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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런콩 Mar 31. 2024

애도의 기한

적정한 애도의 기간은 얼마일까? 그게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면 말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8년이 지났다.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집엔 큰 변화가 없다. 같은 집에 가구를 들여놓거나 빼지도 않았다. 다만 초등학생이던 막내가 고등학생이 되어서 방 세 개가 세 남매 공간으로 꽉 차게 되었다. 엄마는 거실에 둥지를 틀었다. 볕이 들던 창가는 옷장으로 가려놓았다. 소파와 티브이 사이에 매트리스를 깔았다. 엄마는 막내를 깨워줘야 한다는 이유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아침 7~8시가 되면 겨우 잠에 들고 그렇게 오후 2~3시까지 잔다.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벽면 오른쪽엔 아빠 사진이 걸려있다. 엄마의 침대에 누우면 바로 보이는 자리다. 정 가운데엔 십자고상이 있다. 가톨릭 신자인 엄마는 집 안 구석구석 고상을 두었다. 한때 엄마는 불 켜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집안 밝은 것의 전부였다. 엄마는 지겹도록 옛날 드라마만 본다. 소파에 앉아있는 내게 아빠와 있었던 일을 자주 되새김질한다. 나는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대신 “제발 봤던 건 그만 보면 안 돼?”라고 말할 뿐이다.


사비나 이모는 엄마의 20년 지기다. 이모는 나의 가톨릭 대모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이 중국에 살았을 때 이모와 처음 만났다. 중국 칭다오엔 겨우 2년을 살았을 뿐인데 엄마와 이모의 연은 2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이모가 아직 칭다오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어쩌다 한 번 만난다. 나는 이모가 우리 집에 오는 게 좋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면 집안이 시끌벅적해져서 좋고 혼자 오면 엄마가 내게 못 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좋다. 지난번 이모가 한국에 들어왔을 땐 엄마를 데리고 같이 비자를 받으러 갔다. 덕분에 엄마는 오랜만에 바깥바람도 쐬고 명동 일대를 거닐었다고 한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모는 양말을 벗으며 내게 “너희 엄마 우울증이야, 얘”라며 “밖에 좀 데리고 다녀라”라고 했다. 그렇게 말해주는 이모에게 고마웠다. 내가 담아두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이었다. 나는 늘 ‘비타민D 부족’을 운운하며 엄마에게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지난달 말엔 중국에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 지역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일부러 칭다오에 가겠다고 했다. 18년 만에 밟아보는 청도 땅이었다. 호텔에 지하철로 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가 살던 시절만 해도 지하철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무조건 택시를 잡아타야 했다. 숙소는 오사광장역 앞 샹그릴라 호텔이었다. 눈이 내리는 바람에 이모가 나를 데리러 나오지 못했다. 우리는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호텔 로비에 도착하니 이모가 있었다. 2주 만에 본 것이었지만 반가웠다. 내가 배정받은 신관 건물 12층 방에 짐을 급하게 풀고 밥을 먹으러 갔다. 이모의 단골집에서 버섯과 각종 두부, 야채를 수북이 쌓은 후 마라 소스에 볶아달라고 했다. 감자채볶음과 리치맛 환타도 주문했다. 밥을 먹는 동안 우리는 눈이 그치기만을 빌었다. 눈은 그만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모는 내게 “고속도로가 막힐 것 같다, 청양으로 갈래?”라고 물었다. 청도 시내에서 청양까지는 차로 한 시간이었다. 이모는 “아빠 돌아가신 지도 꽤 됐지?”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모는 엄마가 저리 허송세월 보내는 걸 지켜보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아빠 물건을 정리하고 이사를 가야 한다고도 했다. 지난번 우리 집에 왔을 땐 엄마가 계속 아빠 이야기를 하길래 “남편 그만 붙잡고 있어, 네가 놔줘야 너희 남편도 좋은 데 가지”라며 엄마를 나무랐다고 한다. 내가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엄마가 부여잡고 있는 어둠이 나까지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이모는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신지 잘 모르고 있었다. 아빠의 사인을 우리는 꽁꽁 숨겨왔다. 우리가 유가족일 뿐 아니라 자살 생존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이모에게 처음으로 사실을 털어놓았다. “어머 얘, 너희 엄마 모든 게 이해가 간다, 어쩜 그런 일이 있었니?”라며 이모는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이제는 아빠를 놓아주어야 할 때라고 했다. 아빠가 좋은 곳에 갈 수 있게라도 말이다.


애도에 기한이란 게 있을까? 딱 10년이면 괜찮아질까? 2년만 더 이 고통을 견디면 우리는 아빠의 터널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평생을 그리워해도 모자란 사람이 있다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엄마가 엄마의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시간으로 여생을 채우지 않았으면 한다. 아빠는 이런 나를 야속하다고 할까?


이모와의 하루를 보내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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