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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칠 Jan 09. 2023

건강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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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도 일이다.” 얼마 전 홀타운 미팅에서 대표가 한 말이다. 동료에게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주기 위해, 하던 일을 차질 없이 해내기 위해선 건강을 지키는 것도 일이라는 맥락이었다. 그 날로 회사엔 건강검진이 새로운 복지로 추가됐다.


2

나는 일은 묵묵히 하고 복지는 빈틈없이 누리는 흔한 직장인이다. 잠자코 제일 가까운 날로 예약을 잡아 검진센터에 갔다. 인생 첫 건강검진이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몸에 걸친 초록색 가운의 서늘한 감촉 덕분에 헐렁한 가운에 맥없이 쌓여있는 몸뚱이에 생각이 가닿는다. 동시에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부분들, 외모, 직업, 취향 같은 것들은 사실 가운처럼 얇디얇은 지표층에 불과하단 생각도 든다. 나는 내 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모른다. 나는 모른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를 모른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주욱 나를 몰랐으니까. 나의 경계를 파악하기 위해 관계를 맺고, 나를 찾기 위해 꿈을 꾸고, 결국엔 나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하게 된다. 관계 맺기, 꿈꾸기, 일하기가 인지의 차원에서 ‘나'를 정의하는 활동이라면 건강검진은 육체의 차원에서 그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는 활동이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니 간호사가 손끝으로 반대편 복도를 가리킨다. 얇은 옷에 쌓인 사람들이 앉아있고 앞엔 문들이 많이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를 해부할 시간이다.


3

종합검진센터는 미로 같았다. 방 번호를 찾아 헤매다 문 앞에 카드 키를 찍으면 내 번호가 화면에 나타난다. 잠시 기다리다 보면 기계음이 내 번호를 부른다. 어떤 의사는 눈을, 어떤 의사는 귀를, 어떤 의사는 가슴속을 살펴본다. 결과는 당장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들이 내 몸속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혹시 어떤 질병을 발견한 것은 아닌지 몹시 궁금하다. 나는 최근에 부쩍 늙어버렸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모든 검사의 끝은 위내시경이다. 입에 튜브를 물고 태아처럼 웅크려 누웠다. 어제는 오늘 건강검진을 위한 시간을 만들기 위해 일을 두 배로 해야 했으므로 거의 잠을 못 잤다. 팔에 바늘이 꽂힌다. 아마 곧 잠에 들 것이다. 기우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걱정된다. 용종 같은 것이 보이면 검사하는 즉시 떼어낼 것이며, 추가 비용이 부과된다는 내용이 적힌, 조금 전 사인한 동의서가 생각난다.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야. 이렇게 잠도 못 자고 커피로 버티면서 일하는데 멀쩡할 리가 없어. 그런데 내가 왜 여기 누워서 이런 두려움을 느껴야 하지?


건강도 일이라는 대표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다. 건강검진이 복지에 추가됐다는 발표와 함께 한 말이라는 맥락을 고려하면 이보다 합리적일 수 없다. 그러나 튜브를 물고 바늘에 꽂혀있는 처지가 되고 보니 합리성으로 짜인 그물에 걸린 날파리가 된 기분이다. 나로 살아보려고 일을 찾았고, 그 일을 하다 보니 건강을 잃었는데, 이제 와보니 건강을 지키는 것도 일이었다.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4

눈을 떴다. 다 자라 태어난 송아지가 된 기분이다. 간호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라고 한다. 당연한 요구를 자신 없게 따라본다. 뱃속엔 과연 뭔가가 있었다고 한다. 의사는 무어라 설명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멀쩡히 걸어들어와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야 풀려나다니. 커피 생각이 간절하지만 당분간은 참아야 한다고 한다. 뭔가를 떼어낸 값을 치르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평일 낮 3시. 이 시간에 회사 밖에 자유롭게 서 있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다.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회사는 멀지 않다. 회사로 가야 할까? 이전에 다니던 회사도 멀지 않다. 옛날 상사의 안부가 문득 궁금하다. 그는 워커홀릭이었다. 가끔 반반차를 내고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의사가 죽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살라고 했다"라는 말을 농담조로 흘리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가서 수다를 좀 떨면 어떨까 싶었다. 건강 얘기로 운을 땐 다음에 이렇게 얘기하는 거다. “그래도 우리는 참 운이 좋아요. 그렇지 않아요? 존경할 만한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사대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잖아요! 당장은 존재가 지워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 얼마나 좋아요. 이렇게 건강검진도 받고!” 그러다 그 상사도 이직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나. 이대로 그냥 집으로?


비틀대며 병원 뒷골목으로 나선다. 건물의 그늘 아래에서 다리에 힘을 주고, 비틀거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며 걷는다.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에 무언가 잡힌다. 식권이다. ‘병원 뒤편 편의점 좌측 골목 50m 내에 있는 식당에서 사용 가능. 북엇국과 죽 중 택 1’ 식권을 보니 비로소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겠다. 건강이 일이라면 밥을 먹는 것도 일이다. 나는 비록 잘 해내지 못하고 있음을 판정받았지만, 어쨌거나 식권을 받아냈다. 식권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안도감을 주는지.


젊음이 떠난 자리엔 무엇이 남아있나. 병든 몸이 남아있다. 청춘이 있던 자리는 무엇으로 대체되나. 일로 대체된다. 일을 해낸 자에겐 무엇이 주어지나. 밥이 주어진다. 하룻밤을 꼬박 굶었더니 밥맛이 아주 좋다.



[풀칠 105호] '건강이 최고다' 혹은 '건강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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