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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칠 Oct 28. 2022

누구를 위하여 잔을 올리나


직장 동료들은, 더 정확히는 상사들은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안다. 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술을 꽤 즐겨하는 편이고 주종도 다양하게 마신다.


고기나 해산물을 곁들인, 본격적인 저녁 자리에선 소주를 즐겨 마시며 소맥도 마다하진 않는다. 퇴근 후 기분 전환을 위해서 매일 편의점에서 맥주 캔을 사서 귀가하며, 와인에 대해 빠삭하진 않지만 매번 다른 제품을 마시며 내 취향을 찾는 중이다.


그런가 하면 한 때는 전통주에 관심을 갖고 양조장에서 운영하는 시음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날 들이키는 하이볼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고, 많이 마셔도 숙취가 없기로는 사케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엔 누군가의 소개로 종로3가역 뒷골목에 있는 한 횟집에서 오이소주를 마셨는데 끝 맛이 깔끔하고 향이 너무 좋아서 오이가 가득 담긴 주전자에 소주를 두어 병을 더 부어 마셨던 기억이 난다.(다시 생각해보니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재앙일 수 있겠다.)


서두가 길었다.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 데도 회사에서 내가 술을 싫어하는 사람, 또는 술자리를 마다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이유는 아마 술자리의 환경이 달라서 일 것이다. 나에게 술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주종도 안주도 아니고 잔을 함께 부딪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 사람들과 술자리를 갖는 게 너무너무너무 불편하다.


술자리의 묘미는 사회성의 나사를 조금 느슨하게 풀 수 있다는 점인데 나이 많은 상사들과의 회식 자리에선 그런 게 가능하지가 않다. 일단 술을 먹었으니 취기는 오르는데, 진심과 제 성격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데 그걸 털어놓을 수 없을 때 느끼는 허전함과 부대낌이 너무 싫다.


결국 내가 회사 사람들이 불편하고 어려운 게 문제라면 문제인데 그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는 좌고우면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실 자유가 있는데. 그리고 애당초 회사라는 조직은 내가 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잦은 회식 자리와 많은 음주를 요구하기도 한다.


한번은 일적으로 참여한, 너무 불편한 자리에서 누군가 구태여 양주 한 병을 더 따는 걸 보면서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나는 그 사람의 목을 따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 날 택시를 탄 기억은 있는데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으며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 콘택트렌즈가 방안 바닥에 말라붙어 있었다.


그러니 도대체 회사에서 술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기분 좋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릴 수 있을 리가. 술을 좋아하지 않고 잘 못 먹는 것처럼 보여야 회식 자리에서 술을 조금이라도 덜 먹을 수 있다는 전략적 선택 외에도 정말이지 회식자리에선 맛있게 술을 마실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회식이 줄어든 건 코로나의 정말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 팀 회식은 드문드문 있었지만.(“다들 고생했는데 회식 한번 해야지!”) 그때마다 이 시국에 어떻게든 회식을 하고 싶을까 싶어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이 코로나19 거리두기가 점차 완화되고 식사 가능 인원과 시간이 늘어났으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지난달을 기점으로 회사 전체 회식이 자꾸만 탄력을 받고 있다. 회사에서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처음 보는 거 같은데, 뉴스에서 나온 ‘보복 회식’이라는 단어가 남 얘기가 아니라고 뼈저리게 느낀다.


보복 회식은 이미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며칠 전 비즈니스 미팅을 진행했는데 점심 식사 장소에서 만난 상대방의 낯빛이 너무 안 좋았다. 내 눈빛을 읽었는지 그가 먼저 말했다. “어제 몇 년 만에 4차까지 달렸네요.” 평양냉면 국물을 들이키며 시시각각 생기가 돌아오는 그를 보며 한동안 경제 활성화라는 미명 하에 얼마나 많은 간이 굳어갈 것인지 생각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헤밍웨이 소설의 제목을 다시금 떠올린다. 침목 도모를 핑계로 회식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함께. 회식을 한다고 사내 커뮤니케이션이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이른 잠을 청하고 개운한 얼굴로 만나는 게 직장 동료를 더 밝은 얼굴로 맞이할 수 있는 비결 아닐까. 정말 묻고 싶은 심정이다. 누구를 위하여 잔을 올리나?






야망백수

얼마 전에 회식에 갔습니다. 술도 사람도 약하지만 둘 다 나름 좋아하는 편이라 거부감은 딱히 없었습니다. 일하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일 얘기도 조금은 했고, 우정을 나누진 않았지만 잔은 꽤 많이 나눴습니다.


그날 새벽 힘들게 잡은 택시 안에 앉아있다보니 속이 울렁거리더군요. 위가 아니라 마음이요. 뭐랄까, 몇년만에 연락 온 친구 결혼식에 마지못해 들를 때의 기분 같았습니다. 사람구실을 해냈다는 게 뿌듯하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론 아무도 봐주지 않는 긴 연극을 겨우 마치고 돌아가는 길처럼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식은 소주처럼 미적지근하기만 한 나를 미워해볼까하다 그마저도 귀찮아 드러누웠습니다.


어떤 이들은 일상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선 ‘리추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회식과 같은 의례들이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위에 의미를 기록하는 눈금자가 되어준다고요. 한편, ‘디즈니랜드가 존재하는 이유는 현실이 디즈니랜드라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삐딱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회사생활은 본질적으로 ‘억텐’인데 이를 은폐하기 위해 더 ‘억텐’인 회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회식은 직장생활이라는 매트릭스를 유지시키는 리추얼일까요, 은폐하는 디즈니랜드일까요?


오늘은 회식이 없습니다. 일이 남긴 했지만 더 늦으면 차가 끊기므로 일단 집에 가는 중입니다. 지하철 안에 실려가는 지금보다 술에 취해 회식의 의미를 고민하던 며칠 전이 차라리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회식의 의미는 어쩌면 반복되는 일상에 취한 정신에 들이붓는 숙취해소제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매오

여럿 모여 식사하는 자리, 어쩌다 보니 단 둘이 테이블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그 분은 익숙한 듯 선언하더라고요. “제가 스몰토크에 능숙한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얼른 받았습니다. “저도요. 그냥 밥만 먹어도 됩니다. 그냥 술이나 드시죠.” 에너지 절약이 다른 게 아닙니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궁금한 게 있을 때 묻고 질문을 받으면 성실하게 답해주는 것. 현란한 스몰토크가 만능열쇠까진 아니더라고요. 누군가는 울트라 하이퍼 스몰토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 그런 ‘누군가’가 꽤 많다는 걸 알고 나니 사회 생활 하기가 좀 더 편해집디다.



파주

‘양주 한 병을 더 따는 걸 보면서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나는 그 사람의 목을 따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 섬찟한 문장 속에 회식을 향한 마감도비님의 한이 그득하게 서려있네요… 가끔 연락할 때마다 매번 ‘회식하고 있다’고 답을 하던 마감도비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거 같습니다.


저는 코시국 덕분에 한동안 회식자리란 걸 가져본 적이 없는데요. 이게, 안 하다 버릇하니까 또 당기는 날이 있더라고요. 까놓고 말해 이 글을 쓰는 지금 회식 자리에 앉아있는데요. 매번 칙칙한 회사에서만 보던 동료들을 삐까뻔쩍한 조명 아래서 소고기를 먹으며 보는 것도 나름 신선한 경험이더군요. 이 좋은 사람들과 성과도 내고 나름의 우정도 쌓은 수 있다면 하는(거기에 더해 두둑한 성과금을 쟁취하고 싶다는) 소망까지 품을 정도로요. 아휴, 이제 남은 일은 제가 잘하는 일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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