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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UKGEE Apr 06. 2021

내 생의 마지막육아휴직 중입니다

“애들 다 크지 않았나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내가 작년에 육아휴직을 하겠다고 부서장에게 말했을 때의 반응이다. 당시 내 두 딸들의 나이는 만으로 13세, 8세로 중1, 초2 였다. 육아휴직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녀가 미취학 아동인 경우가 많고 그때가 더 필요한 시기라고 본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영유아기 1순위, 초등 저학년 때가 2순위로 휴직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 사이에는 어린이집에 보내서 아이 보육에 공백이 없었지만, 초등학교 입학하는 순간부터 점심 먹고 오후 1시만 되면 집에 오는 아이를 돌볼 방법이 많지 않았다. 학교 돌봄 교실이 있지만 정원이 제한되어 있어 추첨제로 뽑다 보니 확신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학원으로 돌리자니 아이가 너무나 피곤해해서 집에 혼자 있게 하는 게 나았다.


이런 이유로 둘째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에 육아휴직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나 스스로 보류하던 것이 늦어져 버렸다. 그리고 작년 초에 터진 코로나 사태로 아이들은 집에 발이 묶여 버렸고, 직장에서도 코로나로 인한 급격한 상황 변화에 휴직 얘기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다 작년 하반기가 되어서야 문득 정신을 차리고 인사팀에 육아휴직 관련 문의를 하니 아이가 만 8세까지만 가능하니 아이 생일 전에 복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가 6월생이라 당장 신청을 해도 7개월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후임자 없이 무작정 내 자리를 공석으로 만드는 건 동료들에게도 못할 짓이라 정기인사가 있는 연말에 휴직을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최초에 최대 1년을 계획했던 육아휴직기간은 어중간한 5개월이 되었다. 그리하여 어쨌든 나는 지금 내 생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육아휴직 중이다.


2007년 1월 나는 20대의 마지막 해에 첫아이를 출산했다. 3월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어서 육아휴직은커녕 출산휴가 3개월도 다 채우지 못하고 대학원 연구실로 출근해야 했다. 직장에서 지원받아 가는 대학원이어서 휴직을 할 수는 없었지만 휴학을 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젊은 패기였는지 무모함이었는지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모든 게 처음이었기고 몰라서 용감했던 그 때는 육아휴직 없이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지나갔다.


2012년 첫째와 다섯 살 터울의 둘째를 출산하고서야 첫 육아휴직을 했다. 출산휴가 들어가기 전 연달아 육아휴직을 한다고 하니 남자 동기들이 “부럽다, 푹~쉬다 와라.”라며 인사랍시고 해주었던 말들이 기억난다. 둘째 임신 때부터 남편은 강원도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나 홀로 만삭의 몸으로 일하면서 첫째와 지내던 때였다. 퇴근 후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온 첫째 저녁도 못 챙기고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그 시절의 고단함은 잊을 수가 없다. 하루라도 빨리 집에서 쉬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동기들의 말에 토를 달 기운도 없어 “그래~고마워. 잘 있다 복직할게.”라고 답했다. 정작 출산 후 휴직 중에 그 말을 들었다면 정색하며 “쉬긴 뭘 쉰다는 거야? 집안일과 육아는 노는 거야?”라고 쏘아붙여주었을 텐데 아쉽다.


그 당시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폐해져 있었지만 숨 돌릴 틈 없이 기계처럼 돌아가던 날들이 나에게 그 사실들을 인지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단지 나는 좀 많이 피곤하구나 생각했다. 순했던 첫째와는 딴판으로 잠투정이 심한 둘째 덕에 잠은 항상 부족했고, 모유 수유하며 남편도 도우미도 없이 나와 첫째의 삼시 세 끼를 챙겼다. 집에서 꽤 멀었지만 차량 운행을 하지 않아 첫째의 어린이집 등하원도  갓난쟁이를 데리고 직접 시켜야 했다. 한밤중에 두 아이 중 한 명이 아파서 응급실이라도 가야 하는 날엔 놀랄 겨를도 없이 두 아이를 깨워 가방을 싸 병원으로 가야 했다. 임신 중에 소실된 몸의 근력을 회복할 새도 없이 혹사당한 손목과 무릎에 연골 연화증, 관절 염증이 생겨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와 항생제 처방을 해주었지만 아이를 안고 누워 물리치료를 받을 수도 없으니 약만 받아와야 했다. 첫째 출산 때와 상황이 많이 다른 내 몸의 상태에 무관심했던지라 수시로 편도선염에 후두염이 생겨 또 다른 항생제를 먹고 버텼다. 애석하게도 내 첫 육아휴직의 기억은 이런 처절함이 대부분이다.


내년 3월이면 나는 직장에서 만 20년 차가 된다. 그 20년 중 15년은 엄마이고, 15년 중 10년은 남편과 떨어져 혼자서 아이들을 키웠다. 작년 연말에 남편이 서울로 올라와 10년 만에 살림을 합쳤고, 그리고 나는 내 생의 마지막 육아휴직 중이다. 지난 3개월 동안 코로나로 제대로 된 여행도 갈 수 없었지만 겨울방학 내내 아이들과 함께 지냈고, 주말에는 네 명이서 TV 앞에 나란히 앉아 수다 떨며 다 같이 넷플릭스 드라마 정주행도 한다. 아침마다 ‘엄마 갔다 올게. 저녁에 보자.’라고 내가 먼저 뛰어나오며 인사했었는데 ‘학교 잘 다녀와’라고 여유 있게 아이들을 배웅한다. 그리고 둘째는 초등학교 입학하고 처음으로 등하교를 나와 함께 하고 있다. 벌써 3학년인데 엄마가 같이 가는 게 부끄럽지 않냐고, 만약 그러면 엄마가 안 가겠다고 물었더니 아이는 이것도 6월 되면 못하니 이대로가 좋다고 한다. 하굣길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 끊임없이 조잘대고,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와 가게에 들려 아이스크림 사 먹기도 하고 싶었다는 둘째를 보면 짧지만 이 휴직은 정말 옳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휴직은 출산과 연계한 육아휴직이 아니기에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주이지만 첫 번째 육아휴직 때와는 달리 나도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에 문화센터에 등록해 요가도 하고, 한적한 평일 공원 산책도 하고 들어온다. 틈틈이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필사도 하고 그림도 그린다. 시간 단위로 쪼개어서 계획해야 가능하긴 하지만 아이들 학원가는 시간에 잘 맞추면 혼자 영화도 한 편 보거나 근처 미술관 전시도 보고 올 수 있다.


이번 주는 집에서 zoom 수업인 첫째와 점심을 먹다가 둘째 하교 시간이 되어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하니 "엄마는 휴직인데 왜 출근할 때보다 더 바빠요?"라고 물었다. 집안에서도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고, 틈나면 나갔다 오는 엄마가 더 바빠 보였다 보다. 어쩐다, 앞으로 남은 2달은 더 바빠질 것 같은데 말이다.


종종 친한 후배나 선배들이 톡이 온다. 휴직 잘 보내고 있냐고, 언제 복직하냐고. 나에게는 이리 빠른 시간이 그들에겐 엄청 더디 흐르는가 보다. 나는 너무 잘 지내고 있고, 복직일은 정해져 있지만 벌써부터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답한다. 적응할 만하면 돌아가야 하는 형편이고 복직 전에 가족여행 한 번 제대로 못 다녀올 가능성이 크지만 나는 정말 후회 없이 잘 보내고 있다. 뭔가 특별하고 거창한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닐지라도 나와 나의 가족들이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시간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짧아서 아쉬운 5개월이 아니라 1년을 집에 있었다한들 복직할 때 그 기간이 충분했다고 느껴질 것 같지도 않다. 뭐든지 차고 넘치면 넘치는 만큼 느끼는 것이 아닌 것을 숱하게 경험해왔으니.  그저 복직 후에 내가 언제까지 지금의 직장에서 머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하루하루가 넘어가는 속도를 보면 앞으로의 10년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다. 나와 가족들을 잘 돌본 에너지로 복직해서의 내가 좀 더 생기있는 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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