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UKGEE Oct 09. 2020

마라가 나를 불렀네

되는 일이 없던 날의 작은 위로

그런 날이 있다. 어느 하나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고, 작정한 듯이 나의 루틴을 깡그리 무시하는 날. 어제 늦은 밤부터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는 새벽이 되어서 빗방울이 굵어졌다. 아파트 입구에 서서 회색빛 아파트 사이에 주차되어 있는 자줏빛 내 차와 그 앞에 평행 주차되어 있던 흰색 SUV를 보고서야 내 손에 우산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시 올라가기에는 출근 시간이 빠듯했으며 차 안에도 여분의 우산이 있었고, 지금 여기서 차까지는 10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우산도 없는데 저 흰 차도 밀어야 한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있는 일이고 매번 이 차다. 소형 SUV이고 기어 중립에 사이드 블레이크만 풀려있으면 내가 밀어도 잘 밀렸다. 평소와 같이 차 앞쪽으로 가 밀어 본다. 그런데 꿈쩍을 안 한다. 빗물 때문에 미끄러워서 그런가 싶어 손을 닦고 다시 밀어봐도 마찬가지다. 사이드가 안 풀려있는 거다. 주변에 도와줄 사람 없나 두리번거려도 아무도 없다. 경비아저씨가 계시나 싶어 경비실을 들여다보니 지난밤엔 우리 라인 아저씨가 당번이 아니었나 보다. 차주에게 직접 전화하는 수밖에 없어 차 앞유리 어디를 뒤져봐도 전화번호가 없다. 화도 나지 않는다. 결국 아파트 등록 스티커에 붙어있는 동호수를 보고 관리사무실로 가서 그 집으로 전화해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차 주인이 우리 라인에서 나와 사과 한마디 없이 차를 뺄 때까지 기다리면서 사무실로 전화해 오늘 지각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여차저차 설명하자니 구차해져서 대강 얼버무리고 나니 택시로 출근했어야 했나 잠시 생각했다. 오늘 오후에 출장이 있었고, 비도 오니 내 차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결과론적으로 오늘 내 차를 쓰기 위해 지각을 한 것으로 합리화했다. 물론 사무실 가서는 평행 주차해놓고 사이드 푸는 걸 깜빡한 저 사람 때문이었다고 열을 내며 설명할 참이다.     


다행히 많이 늦지는 않았다. 15분 정도 늦었나 보다. 조용한 사무실에 적막을 깨고 들어오는 민망함도 잠시, 부랴부랴 컴퓨터 전원을 켜고 자리에 앉는다. 오늘 일정 확인하고 공람 문서들부터 훑어본다. 어제 메일로 받은 회의자료를 확인하고 있으니 사무실 전화가 울린다. 딱 1년 후배인 W였다. 그녀도 오늘 회의에 협조부서 참석 대상자여서 내 차로 같이 이동하기로 했었다.

“선배, 회의 시간이 1시 30분이니까 일찍 출발해서 근처에서 밥이나 먹어요. 여기서 밥 먹고 출발하면 너무 빠듯해요~.”

“그래, 그러자. 11시에 주차장에서 보자.”

나 혼자였다면 그냥 밥을 빨리 먹고 출발하는 방법을 택했겠지만 후배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를 못 찾아 동의했다. 비도 오는데 어디서 뭘 먹겠다는 걸까. 계획은 있는 거겠지. 그렇게 W와 얕은 불안과 함께 출발했다. 비가 와서일까 출퇴근 시간도 아닌데 유난히 차가 막혀 예상했던 1시간보다 30분이 더 걸렸다. 예상대로 W는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계획이 없었고, 광화문이 목적지였던 우리는 가는 길에 반포대교를 건너자마자 이태원 옆 경리단길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주차할 데는 있으려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예전에 왔을 때 위쪽에서 공영주차장을 본 것도 같아요.”

“그래...”

뭐 하나 확실한 건 없구나. 이 계획 없음과 불확실성에 기인하는 답답함이 명치까지 올라온 듯하다. 오르막 길 양 옆으로 크고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비 오는 평일 늦은 점심시간인 데다 코로나 영향인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이 많았다. 열었다 한들 차를 억지로라도 세워둘 공간조차 없었기에 W가 말한 공영주차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계속 올라가기만 했다.

“주차장이 여기 있는 게 맞는 거겠지?”

“그러게요~선배.” 그러게요라니. 그때였다.

“저기 있어요~!”

입차와 출차가 동시에 안 될 것 같은 좁다란 공영주차장 입구가 보였다. 시간은 1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거 먹고 바로 출발해도 회의시간이 빠듯했다. 그냥 이대로 광화문으로 가서 샌드위치나 먹는 게 낫겠다고 W에게 말하려는 찰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회의 취소를 알리는 전화였다. 이유를 설명하면서 난처해하는 담당자의 목소리가 안쓰러워서 알았다고 대답하고 다음 회의 일정을 물어보지도 않고 전화를 끓었다. 밥은 제대로 먹고 갈 수 있겠구나.     

“회의 취소되었데, 여유 있게 밥이나 먹고 들어가자.”

“그래요, 선배. 오늘 이 출장 때문에 다른 일정도 없어요.”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니 비바람이 들이쳐 얇은 여름 슬랙스와 블라우스가 금방 젖어버렸다. 뚜렷한 목적지도 없디 비 맞으며 오르막 길 위로 100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면서 보이는 건 아직 문 열지 않은 칵테일 바나 카페가 다였다. 경리단 길 유명한 식당들은 다 지나온 저 아랫길에 있었나 보다. W와 나는 내리치는 비바람으로 젖은 몸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당황했다. 하는 수 없이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 주차장 옆에 있었던 차이니즈 레스토랑으로 떠밀리듯이 들어갔다. 사실 이렇게 어렵게 와서  비 쫄딱 맞고 겨우 짜장면 따위를 먹고 싶지는 않아서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온 가게였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에어컨으로 냉랭해진 실내공기가 팔에 와 닿아 닭살이 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빨갛고 진한 청록색이 어우러진 실내에 중국식 원탁과 일반 테이블이 놓여 있는 이국적인 가게였다. 일반적인 중국집은 아니었다. 간판도 보지 않고 들어온 터라 어리둥절해하던 우리는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이라 한적해진 가게 안 쪽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들어오며 지나온 주방에서는 중국어가 들려왔다.

“현지인이 주방장인가 보네. 맛은 있겠다.”

이윽고 사장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직접 가져다준 메뉴판을 보고서야 여기가 북경오리 전문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점심부터 북경오리 먹게 생겼네...”

우리는 취소된 회의 때문에 허망했고 몸은 한기가 들어 추웠고 그래서 뜨끈한 국물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메뉴판 맨 뒤 식사류 페이지에 있는 짬뽕을 먹기는 싫은 그런 마음이 나로 하여금 먹어본 적도 없는 마라탕 페이지에 멈추게 했을 수도 있겠다.

“마라탕 먹어봤니? 난 안 먹어봤어.”

“아뇨, 저도 처음이에요.”

“이걸 시키면 오늘 여기가 어이없게도 우리의 첫 마라가 되는 거네.”

“ㅋㅋ 그러네요. 시도해볼까요?”

“.... 너 매운 거 잘 못 먹는데 괜찮겠어? ”

“살짝 긴장은 되는데 먹어보죠 뭐”

“그래, 오늘이 하루 종일 그런 날이야. 아주 우발적인 하루야. 그러니깐 고민 말고 그냥 마라탕 먹어보자. 까짓 거.”

마라탕 중자로 주문했다. 면도 들어가 있지 않고 따로 주문하는 것도 없어 공깃밥만 2개를 시키고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마라탕을 기다렸다. 커다란 탕기에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담겨 나온 마라탕에 압도되어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 내가 먼저 앞접시에 국물을 덜어 한 숟갈 입에 넣었다.

“캬~~~”

반사적으로 나온 소리와 함께 마라 국물의 뜨끈한 칼칼함이 입안에서부터 식도, 위까지 그림이 그리며 내려갔다. 온몸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참 정신없이 들어왔는데. 마라가 우리를 여기로 불렀나 보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마주 보고 웃었다. 오늘은 무엇하나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날이었다.

그 덕에 나는 지금 여기 경리단 길 꼭대기 이상한 북경오리집에서 이 마라탕을 먹고 있다.

“그래, 오늘은 이 마라를 먹으려고 아침부터 모든 게 그 모양이었던 거야. 그렇담 납득해줄게”

혼자 중얼거리며 마라탕을 내 앞 그릇 가득 담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