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7년 만에 눈이 내렸습니다

by kseniya

어제 오전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날이 밝은 듯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사방이 뚫유리창 사이로 그림 같은 겨울 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흰 눈과 노란색의 등불의 묘한 조화가 동화 속 동심을 일으킵니다.

눈이란 올 것 같지도 않은 남부에서 살다 보니, 눈은 여전히 신기하고 반가운 손님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만큼 드물게 내리기 때문에 하루동안의 눈이라도 도시는 마비가 되고 모든 것이 올 스톱이 되어 버립니다.


유난히 올해는 저에게 춥고 메마른 한 해였습니다.

전에 비해 추운 겨울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에 집안은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랭함으로 밖의 기온과 별차이를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체감온도는 밖보다 안이 더 춥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맨발로는 도저히 바닥을 걸을 수 없는 차갑고 기분 나쁜 실내가 되어 마음마저도 냉랭함으로 변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집안에 달려 있던 그나마 겨울에는 제 기능을 하던 히터를 여름날 냉방이 되지 않는 이유로 떼어내고, 작은방 하나만이 가동할 수 있는 난방장치를 설치했습니다. 수년간 고혈압과 최근에 얻은 당뇨 판정으로 코비드 상황에서도 기저질환자로 분류되어 가슴을 졸이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이해할 수 없는 무배려에, 나의 불만은 추위와 함께 더욱 냉랭해졌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남편의 무관심은 이 추위에도 끄덕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집으로 이사 온 후, 낡은 가스로 된 벽난로가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연말에는 제발 벽난로의 불빛을 보고 싶다고 애원을 해 보았지만, 그 안에서 타고 있는 불빛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도 역시나 벽난로는 그대로 방치되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많은 여자들이 크리스마스에 하나쯤은 받는 보석 대신 딜을 했습니다. 그 흔한 크리스마스 선물 대신 벽난로의 불빛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요. 드디어 닦달 아닌 아닌 악다구니를 쳐서 결국은 벽난로의 불빛이 올라옵니다... 나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습니다. 아니 스스로 그렇게 나를 위로합니다.



결핍과 맞바꾼 운치


금요일 오후 7년 만에 눈이 내린다는 소식과 함께, 모든 상점은 주말 내낸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요량으로 물건을 사재기하기 위해 뛰쳐나온 사람들로 인해 상점들의 선반은 점점 비어 가고 있었답니다. 아는 지인은 계란을 사러 마켓에 갔다가 남아 있는 계란이 없어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했답니다.

저 역시 상점 직원의 말을 들어보니 사재기를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평상시 줄이 길지 않던 계산대에는 설 명절 같을 때나 볼 수 있는 긴 줄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 가까스로 계산을 마칠 수 있었답니다.


금요일은 공휴일이 아닌 평범한 하루였지만 학교나 관공서는 임시 휴일을 결정하고 목요일 오후부터 집 떠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집안은 어느새 온전한 가족으로 인해 작은 집이 꽉 찬 느낌입니다.

덕분에 집안의 공기는 썰렁하지 않았습니다.

고혈압 환자로 수십 년을 살아오고 당뇨까지 겹친 나의 몸상태가 이 추위에 더욱 나를 수축되게 만들고 있었고, 밤사이 내려간 기온으로 머리 위에 냉랭함으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나의 상태를 알아챈 막내아들이 잠에서 깨어나 달려 나옵니다. 그리곤 냉랭한 나의 손을 꼭 잡고 자신의 작은 방으로 나를 이끕니다.


"엄마 내 방은 안 추워…"


그렇게 다 커버린 아들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자니 아들이 나를 꼭 안아줍니다. 그리고 자는 내내 나의 손을 잡고 내손의 온기를 확인을 합니다. 나의 손이 자신의 손이 벗어나기라도 하면 위치추적기를 찾듯 이불속을 헤메 나의 손을 찾아 다시 자신의 손 안으로 끌어당기고 나서야 잠이

듭니다. 불행 속에도 잠시 잠시 행복이 다녀 가듯이

그렇게 나의 몸이 눈 녹듯이 녹아갑니다. 모처럼 따뜻한 온기 속에 잠이 들었나 봅니다.


큰 아들이 오고 난 후 집안은 더욱 활기차졌고 오랜만애 내린 눈을 온전한 식구들이 모여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고립 속에 꽉 참을 느낀 순간에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았습니다.

발이 묶여 아무 데도 나갈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하루 종일 음식을 해다 나르고 그것을 참새처럼 오물오물 잘도 먹는 아이들을 보며 오랜만에 마음이 촉촉해졌습니다.

여전히 집안은 냉기로 추웠지만 그럼에도 모아둔 나무 가지를 가져다 벽난로에 던져 넣으며 좋아하는 딸아이의 불장난이 시작되고 조금이나마 그 불꽃으로 인해 집안은 더 화기애애해졌습니다.

결핍과 맞바꾼 운치를 느껴봅니다.

수년동안 방치되어 있던 벽난로는 자신을 방치해 둔 냉대에 대한 한풀이를 하듯 나를 위해 열심히 불꽃을 올려주었고, 타닥타닥 불꽃 안에서 타고 있는 장작소리는 현실의 고통을 잠시나마 덜어주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불꽃 속에 비친 나를 보며 결코 쉽지 않은 나의 인생도 봅니다. 그 안에서 나는 인내를 배우고 인생이 별거 아니라는 단순함도 배우고,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운명도 느끼며 그냥 살아갑니다.

나를 바라보며 이 냉랭함에도 불평하지 않는 나의 아바타들이 견디고 내 옆을 지켜주고 있으니까요. 눈이 내리면 다시 그치고 언젠간 녹아내릴 것이고, 계절이 바뀌어 따뜻한 봄이 오듯이 나의 인생도 언젠가는 이 순간이 지나가겠지요. 그 순간순간이 나의 인생이 되어 마지막 시간은 웃으며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 속으로 불행도 함께 태워버리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