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야속하게도 시간은 꼬리에 로켓을 달아놓은 것 마냥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부모님과의 시간에 집중하느라고 그녀를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나의 이 특별하고 평범한 일상을 당분간은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사이사이 그녀는 자신의 스케줄을 비워 놓고 나와 함께했다. 한국에 오기 전 가보고 싶다는 곳을 찾아 그녀와 이곳저곳을 다녔다. 춘천을 갔다 청량리에 내려 장을 보고, 청량리에 간 김에 요즘말로 핫플이라는 경동 1960이라는 스타벅스를 들러 젊은이들 마냥 인증샷도 올리고, 틈틈이 갈 수 있는 곳, 볼 수 있는 곳을 돌아다녔다.
병원 예약이 있는 날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종로 주변에 둘러싼 서촌을 걸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같이 할 수 있는 길동무가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었다. 혼자서도 나는 잘 다니지만, 둘이라서 더 좋은 것이 더 많았다.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내 가슴을 촉촉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갑자기 카톡벨이 정신없이 울려댔다.
나의 카톡 속 배경이 한국인 줄 알아차린 친구들이었다.
이미 한국땅을 밟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친구들은 자신의 차례는 언제쯤 되는 거냐고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나의 방문을 환영했다.
" 기다려!!!"
얼차려를 세우는 병장에 빙의되어 명령이 아닌 농담으로 그녀들의 만남에 줄을 세우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의 귀환을 환영해 주는 친구들이 있어 나는 너무 기뻤다.
15년간의 공백은 부모와의 시간도 중요했지만, 나의 시간도 중요했다.
심지어 한 친구는 한국에 있는 동안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을 나열해서 보내라고까지 해 주었다.
이 사랑받는 느낌, 실로 너무나 오랜만에 만나는 감정이다.
나도 이렇게 사랑받는 사람이었구나!
나를 위해 단숨에 달려와 자신의 시간을 내어 주고, 스케줄을 변경해서 나와의 시간을 만들어 주는 그런 사람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나만 바라보고 있는 부모에게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몰래 집을 나서는 십 대의 발랑 까진 어린 소녀의 죄책감이 생겨났다.
한국의 봄은 추웠다 더웠다를 반복하면서도 다소 예년에 비해 늦어졌다고는 하지만, 늦게라도 거리마다 벚꽃들이 피어나고 벚꽃이 지면 철쭉들이 그 자리를 대신 메꾸어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후줄끄레한 츄리닝 차림으로 슬리퍼 하나를 신고 동네거리를 나서본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봄바람이 살랑살랑 나의 귓가에 데고 속삭였다. 이제부터 봄이라고....
안과 치료를 하려고 집을 나서 서울 나들이가 시작되면 나는 철없는 십 대 소녀가 되어버렸다.
가는 곳마다 나의 과거가 떠 오른다. 기억은 사라져도 그 자리에 감정은 남는다고 인기 웹툰에서 나오는 문장처럼...
가는 곳마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채 지워지지 않은 기억들의 잔재인 감정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경복궁 옆을 지나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서촌을 따라 올라갔다.
미국에서 그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감격했다. 동시에 질투 아닌 질투도 느꼈다. 같은 동년배로 나의 동네 가까이서 젊은 시절을 보낸 그녀와 나 사이의 공통점, 신촌이나 이대 주변에서 한 번쯤은 그녀와 내가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짜릿했다. 그것 말고는 같은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하늘과 땅차이의 그녀. 그녀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 대단한 위업을 나와 같은 동년배가 이루어내어 주워서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그 상을 받는 작가가 나오다니...
그녀가 운영한다는 서촌의 자그마한 서점 "오늘"이라는 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 작은 서점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책이라도 몇 권 구매할 생각이었다. 이미 그녀의 많은 책들을 구매해서 미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짐을 꾸려놓은 상태다. 그녀에 대한 나의 작은 예의다.
길가에서 조금은 떨어진 곳이라 처음부터 찾아가기는 힘들었지만, 그곳을 찾아내고는 생각보다 훨씬 작은 규모에 놀랐다. 더군다나 , 오후 3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는 메모가 붙여진 채 문이 닫혀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실망만 하기에는 서촌은 매력적인 곳이 많았다. 길 하나만 걸어 다녀도 좋을 감성들이 즐비하게 길을 따라 늘어져 있었다. 거리의 매력에 빠져 서촌의 이곳저곳을 활보하고 다녔다.
걷다 보니 인왕산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하며 숲이 우거진 물소리가 나는 계곡이 나타났다. 서울 한복판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숲이 우거진 계곡이 있었다. 아니 조선이 생겨날 때부터 아니면 그 훨씬 이전부터 줄곧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터줏대감이었다.
마을버스 종점인 곳 바로 옆에 그 유명한 겸재 정선의 그림 속의 배경인 기린교가 눈앞에 딱 나타났다. 역사프로에서나 나오던 그 실물을 마주한다는 것은, 좋아하는 연예인의 실물을 눈앞에서 보는 것 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스쳐 지나갔다.
인왕산 계곡을 빠져나와 골목골목 이쁜 카페들을 둘러보며 다시 윤동주 문학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윤동주 문학관을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또 다른 한옥으로 정갈하게 지어진 청운 문학도서관이 나온다.
한옥 안 바닥에 걸터앉아 쏟아져 내리는 작은 폭포의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상무념이 된다.
문학도서관을 따라 또다시 걸어 올라가다 보면 개나리가 노랗게 경계를 이루는 처소 책방카페가 나온다.
오늘 하루의 종착지다. 시원하게 뚫려 있는 테라스에서 자몽 주스 한 잔을 시켜놓고, 시선을 먼 곳으로 두다 보면 이곳이 서울이라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남산 타워가 멀리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우뚝 솟아있다.
자유란 이런 건가! 내 몸 여기저기 덕지덕지 붙어있던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혹들이 조금씩 떨어져 나간 지금, 나는 온전히 혼자가 되어있었다. 어딜 가도 난 자유로웠다. 내 뒤를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고, 나만 바라보는 눈빛도 사라지고 없었다. 목적지 없이 걷다가 걸음을 멈춰도 좋았고, 아무 데서나 손을 벌려 숨을 쉬어도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고독!
자유로운 고독은 나를 살게 해 주었고, 더 큰 숨을 쉬게 해 주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거대한 경복궁 앞의 생소한 월대 앞에서, 두 팔을 벌려 나의 자유를 마음껏 들이마신다.
영원히 녹지 않을 겨울 같았던 나의 마음에도 봄바람이 살랑살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