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엄마의 글쓰기' 강의를 수강하신 수강생의 원고입니다. 아들 둘과 함께 떠났던 이명화 님의 2000년대 초반 뉴질랜드 유학기입니다.
지구 상의 수많은 나라 중에서 유행에 민감하고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 나라는 아마도 단연코 한국 즉, 대한민국일 것이다. 자식을 교육시키는 부모의 입장에서도 교육 트렌드에 맞춰서 빠르게 정보를 수집해서 나의 아이들이 보다 더 많은 경험을 쌓고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대한민국의 부모라면 모두들 공감하는 일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보통의 부모에 지나지 않아 2000년 초반에 조기 유학이라는 바람에 휩쓸려 아이들 2명을 데리고 낯설고 물 설고 아는 이 하나도 없는, 더군다나 영어도 하나도 못하는 내가 아이들과 함께 뉴질랜드 유학 길을 선택을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원활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영어 실력으로 단지 유학원만을 통해 답사 한 번 다녀온 것이 전부인데 나는 과감히 뉴질랜드로의 유학길을 선택을 했다.
2006원 7월에 두 아들과 같이 비행기에 몸을 맡기고 뉴질랜드 오클랜드 공항에 내렸다. 내가 두 아들의 보호자로서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짓누르기 시작을 했다. 그러나 그런 압박감도 느낄 틈이 없이 어이없게도 한국에서 가져간 보리차가 공항 보안대에서 걸리고 말았다. 뉴질랜드는 목축업이 주 수입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씨앗의 반입에 무척 까다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전자사전의 번역기를 돌려서 로스팅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냄새를 맡게 했더니 통과를 시켜 주었다. 무사히 통과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아~~~ 이제부터 시작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뉴질랜드는 학기제가 한국과는 차이가 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합친 엘레멘터리 과정이 6년, 중학교 과정인 미들스쿨이 2년, 고등학교 과정인 하이스쿨이 5년 과장이다. 하이스쿨에서는 대학의 진학에 필요한 과정을 미리 이수를 하면 4년 만에 대학으로도 지학이 가능하다. 또한 우리나라는 학기제이기 때문에 여름방학과 겨울 방학 이렇게 2학기 제인 반면에 뉴질랜드는 텀이라고 하는 쿼터제이다. 짧은 텀 브레이크가 3번에 우리나라와 반대인 남반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한국의 겨울이 거기서는 여름이다 그래서 여름방학이 좀 길다. 이것은 여름휴가와 크리스마스 휴가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생각을 하면 눈이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생각을 하는데 그곳에서는 해변에서 수영과, 서핑을 즐기는 여름의 크리스마스이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고 재미난 일로 여겼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겨울이 좋았던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우리가 여행을 가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과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서 느끼는 것은 분명히 달랐다. 2000년 초만 해도 한국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는 나라였지만 정작 한국에선 많은 이들이 유학을 떠나곤 했다. 동양의 작디작은 나라에서 공부의 열정이 끓어오르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다행히 우리 아들이 공부를 잘해주어 학교에서 중국, 인도 세 나라의 학생들이 수학과 과학을 꽉 쥐고 전교를 휘두르니 질투 아닌 질투를 받기도 했다. 각종 수학 컴패티션이나 올림피아드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거의 중국계, 인도계, 자랑스러운 한국의 아이들이었다. 또한 동양의 학생들은 어른 즉, 선생님을 대함에 있어서도 공손하기 때문에 평가를 좋게 받을 수밖에 없다.
뉴질랜드의 학교 생활이나 과정 중에서도 부러운 점은 일 년에 한주 동안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각 과목 선생님과의 면담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각 과목별로 사전에 시간을 예약(?) 하면 전 과목 선생님들이 강당에 모두 모이고 각자 책상 앞에 앉아서 학생과 학부모를 맞이했다. 이 상담을 준비하면서 선생님은 학생의 모든 기록을 학부모에 보여주며 그 자료를 토대로 상담을 한다 불과 몇 분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지만 따로 선생님을 찾아갈 필요도 없고 궁금한 점은 그 시간에 선생님한테 질문을 하면 됐다. 이런 시스템을 처음 접했을 때 한국과는 많이 다른 점이 은근히 부러웠다.
그리고 또 하나는 대학교에서는 일 년에 며칠 동안은 학교를 오픈을 하는데, 각 과목의 재학생들이 운동장이나 강의실에서 자신들이 배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험이나 세미나 혹은 영상을 준비하거나 대학교수들이 돌아가며 설명을 해준다는 것이다. 미리 전공을 어떤 것을 선택할지를 정하고 지원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운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하나씩 새로 익혀가며 유학 생활을 하던 중,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이 세계인에게 인식이 되는 그런 사건(?) 일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인들에 의해서 유행이 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전만 해도 별 관심이 없는 나라였는데 “강남스타일”의 유행이 강의실에 모여서 노랑머리 학생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고 한국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사건이었다.
지금에는 K-POP이나 K-beauty니 K-FOOD니 뭐 이런 단어들이 흔하게 언급이 되고 자리 메김을 한 어린 친구들에게는 낯선 일이겠지만 몸소 어린 나이에 타지에서 노랑머리 친구들에게 파란 눈의 선생님에게 차별을 받아 본 이들은 알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차갑고 냉정한 시선인가를. 그래서 친구들이 한국에 대해 물어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가 된 K문화의 영향이 머나먼 타국에서 더더욱 기쁘게 다가왔다.
유학을 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뉴질랜드는 급식이 없는 관계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야 한다. 그곳의 아이들은 샌드위치에 우유 하나 사과나 바바나 하나면 충분 하지만 우리 아들들은 밥을 먹어야 힘이난 다고 하니 도시락을 싸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보온 도시락에 카레를 싸줬는데 카레의 냄새가 심하다는 이유로 아이를 교실이 아니니 밖에 나가서 먹으라고 한 것이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그다음부터는 김밥을 정말 많이 싸줬다. 그런데 그곳 친구들이 김밥만 가져가면 하나 달라고 난리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엄마의 김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유학의 기억이 경험이 아이들의 기억에 어떻게 새겨졌는지는 모르지만 좋은 경험으로 남았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다. 엄마는 최선을 다했으니 그 마음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험이 밑거름이 되어 앞으로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우리 엄마도 이렇게 해쳐나갔는데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고난과 역경이 생기더라도 뚫고 나갈 원동력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60을 바라보는 내 나이에 만약 나에게 그때로 돌아가 아이들을 데리고 유학을 떠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가끔 생각한다. 대답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마흔이었던 그때 나는 겁이 없고 용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에 조심스럽고 자신이 없어진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나이라는 숫자와 체력도 바탕이 되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용감히 떠났던 그때의 내가 참 자랑스럽다. 혼자 지내며 외롭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기러기 아빠로 생활할 남편을 생각하면 난 더 열심히 살아야 했으니까. 누군가 나에게 유학과 교육에 대해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엄마의 선택과 의지를 믿어보라 말하고 싶다. 젊디 젊은 자기 자신을 믿어보라고 말이다. 나도 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 엄마는 강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