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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주 Feb 12. 2024

임조현

이주의 사람 시리즈

贈友人(증우인) - 외와 최림

白日有朝暮 靑山無古今(백일유조모 청산무고금)
一樽榮辱外 相對細論心(일준영욕외 상대세론심)
밝은 해도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푸른 산은 고금이 변함이 없는데
우리네 마주 앉아서 잡담이나 나누세.



연초부터 포도주를 마셨다. 조현과 만남 장소를 정하는 건 쉽다. ‘어디서 볼까’ 물으면 ‘그냥 서촌이나 걷자’ 대답한다. 대화도 쉽다. 일상을 채우는 취향도, 싫어하는 부류도 비슷하다. 적당히 남욕도 한다. 타인의 단점을 들추다 새캄한 공기가 오고 있다고 느끼는 타이밍도 비슷하다. 그럼 서서히 화제를 바꾸는 데 불편함이 없다. 지난 연인도 꺼낸다. '네가 미숙했지' 혼내다가도 '그래도 네가 어디가 부족해서' 괜히 발끈한다. 가식은 없지만 애정은 있다. 커피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면 청춘의 사정들이 터져 나온다. 조현과의 대화는 모든 게 적당해서 나만 낙담하고 움츠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1월의 겨울바람에 술이 술술 들어간다. 평소보다 많이 마셔서일까. 알코올이 저 깊이 넣어둔 미안한 마음까지 도달했다. 나는 적당히 편안한 이 분위기에 어색함을 끼얹을 각오를 하고 말한다. 그 일은 미안했다, 고마웠다. 그러나 조현이는 되려 나를 은인이라 불러주며 민망한 위로로 답한다. 용기를 알아주니 와인이 달다. 조선 양반의 시조가 떠오른다. 한 동이 술을 두고 마음에 있는 말이나 편하게 나누자던 최림의 시조. 매번 술과 친구를 찾던 옛 사람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조선 사대부의 마을에서 술을 마시니 옛 사람과도 통하여 본다.

우린 십 오 년 전 매주 광화문 탐앤탐스에서 만났다. 쓸데없다면 쓸데없을 허세스런 글을 쓰고 대화를 나눴다. 한 번은 주제가 '거울'이었다
. 자유롭게 거울과 관련한 글을 쓰면 됐다. 나는 당시 홍대 상상마당에서 직관한 국카스텐의 노래 '거울'을
 골라 해석하는 글을 썼다. 지금 보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저 보컬 하현우의 노래 실력에 홀딱 반해버린 사람의 글이다. 조현이는 좋아하는 영화에서 거울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소개했다. 우리의 눈은 잘 닦인 거울에 청계천의 윤슬이 반사되는 것처럼 빛났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주제들, 그래서 더 초롱초롱했다. 알을 깨고 나가려면 최상급의 영양분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십 오 년 전 알 속의 무한한 세상과 달리 알을 깨고 나온 바깥은 절대적이었다. 우린 그걸 깨닫고 이 시간 속에 갇힌 듯했다. 그간 햇빛에 그을리고 습기에 쩌들어 삼십 중반을 앞둔 우리 눈빛은 바랬다.  


경복궁 담장을 지나 광화문역까지 걸었다. 탐앤탐스는 사라지고 없다. 그땐 그랬지 타령도 멈췄다. 역 앞에서 헤어지며 약속했다. 주변의 사물이 빠르게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우리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음을 잊지 말자. 하던 대로 하자. 나는 그 친구가 과속을 하면 탈이 날 사람임을 안다. 친구도 내가 얼마나 비효율적인 사람인지 안다. 때문에 서로 허세를 부리며 포장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도 안다. 


그땐 그랬지 추억에 살던 귀한 친구가 변하지 않아서 얼마나 귀했는지 모른다. 5호선에서 꾸벅꾸벅 졸며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그림을 그렸다. 나의 알 속 동지가 그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 주책맞은 눈물을 흘리며 동네방네 자랑하는 내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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