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보고 싶고, '엄마'가 보고 싶은 9살의 엄마
오늘은 엄마가 티브이를 보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아빠도 보고 싶고... 엄마도 보고 싶다...”
아빠(외할아버지)는 엄마가 9살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위암이라고 했다. 병원에 가기도 변변치 않던 옛날이 라 오랫동안 집에서 병을 앓다가 결국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돌아가시던 날 -정말인지 모르겠지만- 외할아버지는 병상에 누운 채 어린아이였던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고 한다.
아무 말씀도 하지 못한 채 감은 눈 옆으로 눈물이 줄줄 흘리는 걸 보며 엄마도 "아부지... 아부지..." 하면서 같이 울었다고 한다.
그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9살 엄마에게 너무나 인상적이었던지 엄마는 아빠(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그 이야기를 하셨다. 어린 딸을 두고 갔을 그 부모의 마음이 어땠겠냐며, 부모 된 자신의 감정까지 이입하면서 몇 안 되는 아빠, 엄마와의 에피소드를 늘어두기 시작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막걸리를 만들던 양조장을 운영하셨다고 한다. 양조장의 규모가 어땠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집 안에도 크고 작은 항아리에 술이 그득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였던 것 같다.
남편이 없으니 혼자된 봉기 할머니(엄마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가 밀주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어가신 거라 생각이 들었다. 가끔 밀주 단속반이 나왔을 때 그걸 숨기려고 봉기 할머니가 괴력을 발휘했던 이야기도 늘 같은 레퍼토리로 흘러갔다.
“덩치가 쪼그마난 봉기 할머니가 술항아리를 콰악 마당에 던져버려서 깨트렸단다.”
나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몇십 번이나 들었지만 당최 믿기지가 않는다. 말할 때마다 조금씩 살이 보태지기도 했고, 봉기할머니는 절대 그렇게 화를 내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봉기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7~8년 정도를 나와 같은 방을 쓰며 함께 우리 집에 사셨다. 봉기할머니 성품은 한마디로 보드라운 천사였다. 쪼글거리는 손바닥으로 내손을 늘 부드럽게 어루만지셨고, 말투와 표정은 더욱 말랑했다.
개를 너무 예뻐하셔서, 키우던 개가 아프기라도 하면 개밥을 맨손으로 떠서 입에 넣어 먹여주곤 하셨다고 한다. 키가 나보다 더 작아 150센티미터 정도였고, 둥글둥글한 엄지손가락 같은 보디라인이었다. 반달처럼 둥그런 눈에 하나 가득 주름지며 '호호호' 하며 웃으시던 그런 봉기할머니가 궁지에 몰려서 정말 그렇게 하셨을까? 엄마라면 몰라도. (엄마는 치매를 앓기 전에도 화끈한 여자였다.)
밀주 단속반에 쩔쩔매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린 엄마의 상상 속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엄마가 해주는 과거의 이야기는 대부분 기억에 조금씩 살을 덧붙혀 말할 때마다 같은 이야기라도 과장되기도 하고 조금 더 극적인 상황이 되도록 거짓이 붙기도 한다.
엄마는 봉기할머니에게 거의 매일같이 화를 내셨다. 깔끔한 성격 때문인지 할머니가 가끔 설거지라도 해두시면 고춧가루가 붙어있다는 이유로 집안일에는 손끝 하나 대지도 말라고 하며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하며 화를 내셨다.
실수에 비해 비난이 과했다. 봉기할머니는 무릎관절이 좋지 않아 그 무렵 잘 걷지 못하셨다. 보행기처럼 생긴 워커를 잡고 동네 앞길을 한 번씩 산책 나가실 정도였다.
가뜩이나 불편한 다리로 화장실에 가시면 다른 집보다 조금 더 높은 변기 때문에(그 무렵 화장실 공사를 했는데, 업자가 그렇게 대충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 소변을 누다가 허리춤이나 가랑이 사이에 소변을 흘리는 일이 많았다.
찌른내가 솔솔 나면 엄마의 번개 같은 불호령이 쫙쫙 떨어졌다. 엄마는 당장 봉기할머니의 옷을 갈아입히고, 어떤 날은 목욕까지 해 주시며 땀을 뻘뻘 흘리셨다. 당연히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한다며 목욕을 시키는 내내 잔소리를 이 잡아먹게 셨다.
엄마는 냄새나는 봉기할머니를 잘 정리한 후 같은 방을 쓰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럴 때면 이 난리통의 원인이 '나'였단 말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는 그 찌른내가 잘 나는지도 모르겠고, 사실 난다고 해도 크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봉기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면서 불편한 점이라곤 종종 새벽에 화장실을 가는 봉기할머니때문에 잠에서 깨는 일 같은 소소한 것이었다.
그 당시 내가 자기 전에 읽다 말은 책을 머리맡에 두었는데, 그걸 새벽에 화장실을 가려는 봉기할머니가 차마 불을 켜지 못하고 지나가다가 밟고 미끄러져 누워서 잠을 자던 내 배위로 넘어지신 적이 있었다.
자다가 날벼락 맞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놀란 일이었다. 그래서 봉기할머니가 일어나는 뒤척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잠을 깨곤 했다.
또 가끔 시험기간에 밤늦도록 불을 켜놓기가 미안했던 일도 있었으므로 그정도가 노인과 같은 방을 쓰는 게 불편한 정도였다.
엄마가 화를 낼 때면 괜스레 나도 모르게 원인이 된 터라 옆에서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곤 했다. 그렇게 착하고 순한 봉기할머니를 타박하던 엄마가 밉기도 하고 그 불같은 성질머리가 잘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는데, 이렇게 막상 내가 자식도 낳고 엄마를 모시고 살다 보니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된다.
아들 하나 없는 친정엄마를 당신의 짐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러한 자질구레한 짐을 같이 지게 만든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던 거다. 더불어 경제력을 담당하는 남편에게도 늘 마음이 편치 않고 부끄러웠던 거다. 엄마는 그때도 지금도 아들 하나 못 낳고 딸만 둘 낳아 어쩔 수 없이 사위 밥을 얻어먹으며 살게 된 봉기할머니를 얼마나 불쌍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내 친정 엄마가 내 남편의 벌이로 밥을 먹고, 그 집에서 잠을 자고 내 자식까지 노인네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생각하니 그 미안함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자꾸만 할머니를 구박데기로 만들었던 거였다.
지금의 나였다면 그런 소외감이 들지 않도록 봉기할머니를 더 따뜻하게 안아줬을 텐데... 그때의 나는 그저 무뚝뚝하고 데면데면한 사춘기 고등학생이라 화를 내야만 했던 엄마의 마음도, 뒤에서 구시렁거릴 뿐, 그저 딸의 구박을 모두 받아내야 했던 봉기할머니의 외로움도 헤아리지 못했다. 봉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꿈속에서 나를 보면 웃으시다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셨다. 그 이후 나는 하얀 나비를 볼 때마다 봉기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런데 이제 그런 삼국지의 장비처럼 앞뒤 안 가리고 씩씩하기만 했던 엄마가 '엄마'가 보고 싶고 '아빠'가 보고 싶다고 하니, 9살의 아이로 돌아간 듯 보였다. 그렇게 구박할 때는 언제고, 살아계실 때나 잘하지 같은 마음이 들다가도 눈가에 눈물이 맺힌 엄마의 얼굴을 보니 아 진심이구나 싶었다.
왜 사랑하지 않았겠는가. 왜 그립지 않겠는가. 9살 때 돌아가셨다고는 하지만 그전까지 사랑받던 그 한켠의 희미한 기억이 아직 가슴속에 빨간 숯처럼 은근히 타오르고 있을 텐데, 그것이 어떻게 잊힐 수 있겠는가.
티브이를 보다가 그저 문득 '엄마'와 '아빠'의 따뜻했던 사랑의 기억이 돌연히 이렇게 나타나기도 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가슴 한편이 쓸쓸해지기도 했다. 나도 그러겠지 싶어서.
나도 환갑이 넘더라도, 치매에 걸려 하나씩 기억이 가물거리게 되더라도, 티브이에서 엄마가 나오면 '엄마'가 보고 싶고 아빠가 나오면 '아빠'가 보고 싶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