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엄마
유치원 하원 하는 승규를 데리러 나가려고 옷을 입는다. 요즘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양털 모양의 플리스를 입는데 엄마가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한마디 했다.
"옷이 꼭 하얀 양 한 마리 같다. 전에 숙자 언니가 양을 키웠는데..."
엄마는 이제 누가 듣든지 말든지 혼자 추억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숙자 언니는 엄마의 친언니 월남이 언니의 친구였다.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했는지 따로 살았다.
어릴 때부터 숙자 언니는 할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팔이 한쪽 없었다.
양을 서너 마리 키우면서 젖을 짰다.
뽀얀 젖은 꼭 콜라병같이 생긴 병에 담았다. 그걸 배달하는 일은 숙자 언니 몫이었다.
숙자 언니는 배달을 마치고 엄마의 집에 와서 마루 한가운데 대자로 누워있곤 했다.
월남이 언니는 옷가게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가난한 살림에 입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다행히 집에서 먼 곳은 아니었고, 종종 똥을 누러 집으로 올 수도 있는 거리이기도 했다.
월남이 언니는 변비가 심해서 본가의 변소에서 똥을 누어야 잘 나온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드라마에서 보면 가난한 엄마가 자신의 자식을 부잣집에 입양 보내거나, 다른 집에 식모로 보내는 것은 몇 번 보았으나, 이렇게 실제 그 일이 내 가족에게 일어난다면 어떤 건지 현실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먼 곳도 아니다.
시장만 나가면 만날 수 있는 딸이 내 집에서 나와 우리 가족과 살 수 없다. 엄마와 사이가 나빠서도 아니고, 내 친딸이 아니라서도 아니다.
그저 먹고살려고, 하나라도 입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 딸이 바로 엄마의 언니인 월남이 언니였다.
주말이나 작은 짬을 내면 집에 올 수도 있고, 그럴 때면 집에 와서는 쉰 밥을 물에 말아준 옷가게 여사장님을 욕하며 찔찔 울었다고 했다.
"지금은 잘 살고 있대?"
나의 질문에 멍청한 질문이라는 듯 대답하신다.
"뭐, 잘살겠지. 그 동네 가서 봐도 맨날 똑같은 시골 동네. 생전 달라진 것도 없고 맨날 그러고 살고 있겠지."
엄마와 봉기 할머니(엄마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도 먹고살려고 숙자 언니네처럼 집에서 돼지를 키웠다고 했다.
엄마는 돼지가 얼마나 더러운지 아냐며 말할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구정물 같은 밥을 주면 커다란 코를 쳐 막고 먹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미워서 코를 구정물 통으로 쿡쿡 쳤다고 말했다.
엄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가고 싶었던 학교도 못 가고 집에서 돼지를 키웠으니 오죽이나 돼지가 미웠을까.
"돼지를 팔고 나면 어떻게들 귀신같이 알고 돈 빌리러 오더라. 참 희한하지."
네 마리 정도의 돼지를 키워서 한 마리 팔아 목돈이 생기면 봉기 할머니의 처남인 '멍멍이 할아버지'가 돈을 빌리러 오셨다.
착한 봉기 할머니는 하필 집안의 장녀였다.
밑으로 남동생이 4명, 여동생이 1명 있었다.
그중 막내 여동생의 남편은 얼굴이 희고 눈동자가 노란 '멍멍이 할아버지'였다.
술을 좋아하시고 늘 쉰 목소리였고 심지어 아주 목청이 크셨다. 집에 개를 많이 키워서 지어진 별명이다.
다혈질이었다.
엄마는 그런 멍멍이 할아버지를 어려서부터 못마땅해했다. 제 식구를 더 아끼는 마음에 그랬을 테지. 이모할머니를 고생시킨다며 싫어하셨다.
엄마 집에 와서 술을 거나하게 한잔 마시고 돈을 꾸어갔다.
봉기 할머니는 남동생과 처남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걸 받으러 가는 일에 늘 어린 엄마를 보냈다고 한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고생하며 돼지 키운 생각에, 추운 겨울에 손등이 얼어 터지도록 생선 내장을 따내던 생각에 부아가 치밀어서 그 집에서 몇 날 며칠 숙식을 하며 게부쳐있다가 결국 돈을 얼마라도 받아내서 가져왔다고 한다.
그때 엄마는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 사이의 어린 소녀였다.
먹고살아야만 하는 현실과 돈에 철저하게 시련당하고 살았다.
빚을 받으러 갔던 이야기를 하면 도계에 살고 있던 외삼촌의 집까지 기차를 타고 갔던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탄광촌 앞에서 치킨집을 했다.
보통 광부들은 아주 힘든 일을 했고 몸을 혹사시킨 대가로 돈을 잘 벌었다.
월급날이면 거의 모든 집에서 목에 낀 탄가루를 기름으로 벗겨내기 위해 통닭을 시켜먹었다고 했다.
외삼촌도 사업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자금융통이 어려울 때가 있고 그럴 때면 큰누나인 봉기 할머니에게 돈을 빌려갔다.
엄마는 추운 날 기차를 타고 도계까지 가서 돈 주세요, 돈 주셔야 집에 가죠 하면서 외삼촌 집에서도 며칠을 지냈다.
눈칫밥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어린 엄마가 안쓰러운 외숙모가 몰래 주머니에 돈을 쥐어주시면 엄마는 그 길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엄마의 말대로 사는 게 늘 똑같은 옛날 시골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악한 마음을 가지고 어린 조카에게 그리 대했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먹고 살 일이 궁하고 내 새끼 하나 변변하게 먹이고 입히지 못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엄마가 정통으로 맞은 가난한 세월의 아픔이 왜 이리 시린 건지.
엄마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멍멍이 할아버지와 이모할머니가 병문안을 오셨었다.
"늬 엄마처럼 고생 많이 한 사람 없다. 어려서부터 고생을 정말 많이 했었다. 늘 엄마처럼 불쌍한 사람 없다."
깜깜한 병원 복도에 앉아 내 손을 꼭 잡고 비비고 두드리며 어른들이 얘기했다.
그때는 그냥 하시는 말씀인 줄로만 알았는데 저런 옛날이야기를 듣고 나니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이 왜 그리 이모할머니가 속상해하셨는지도 조금 이해가 되었다.
야간학교도 다닐 수 없었던 어린 엄마, 꽁보리밥을 하도 많이 먹어 지금도 싫어하는 늙은 엄마.
그 사이에 켜켜이 퇴적된 가난한 세월을 날카로운 흔적이 엄마를 아프게 한건 아닐까?
잘 먹고 잘 살았다면 지금처럼 아프지 않았을까?
숙자 언니는 그 이후로 알코올 중독에 걸린 남편을 만나 얻어맞다고 살지는 않았을까?
숙자 언니도 팔 없는 할머니와 같이 살지 않고 부잣집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면 다른 인생을 살았을까?
월남이 언니는 쉰 밥을 울면서 삼키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가난해서 사람의 본연의 가치가 훼손되고 억눌리고 망가지는 것이 너무나 흔하고 당연했다.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입에 무언가 넣어서 굶어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중요했다.
먹을 것이 너무 흔하고 사람 목숨이 가벼운 현실을 살아서 그런지 엄마의 가난해야만 했던 어린 시절이 묵직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