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연애라면, 워킹홀리데이는 동거다.
외교부 워킹홀리데이 수기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
1. 시작은 회색 빛
후텁지근한 여름을 뒤로하고 열 시간을 가로질러 오클랜드 공항에 착륙했을 때, 나를 반긴 것은 칼바람과 함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회색 도시와 지독한 감기였다.
해야 할 일은 빨리 끝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도착한 다음 날부터 한국에서 넉넉히 프린트해 온 이력서를 들고 6인실 호스텔 방을 나섰다. 며칠간 발품을 팔며 눈에 보이는 레스토랑과 커피숍에 닥치는 대로 들어가 살갑게 웃으며 일자리를 구걸했다. 비수기라 일손을 구하는 곳이 많지는 않았지만 다행히도 지원한 곳 중 몇 군데에서 트라이얼을 제안했다. 운 좋게도 첫 번째로 트라이얼을 한 어느 중동음식점에서 곧바로 서빙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수입원이 생기자 조금만 뒤척여도 삐걱대는 벙커침대와 세면도구를 한 아름 안고 씻으러 가야 했던 복도 끝의 공용 욕실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호스텔을 떠난 후에도 환경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대도시인 오클랜드는 서울만큼이나 집세가 비싼 탓에 그 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형태로 구겨지듯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주머니 사정에 맞춰 겨우 얻은 셰어하우스는 겉모습이 꼭 닭장같이 생긴 아파트의 방 두 칸짜리 집이었다. 방 하나에는 인도네시아 부부, 거실 한쪽 구석에는 병풍을 치고 인도네시아 대학생 한 명이 살고 있었다. 나는 방의 절반 가격만 지불하는 조건으로 낯선 사람과 침대를 나눠 쓰게 되었다. 다행히도 생활 패턴과 마음이 잘 맞는 한국인 룸메이트와 착한 하우스메이트들을 만나 다툼 한 번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도착한 지 2주가 채 되지 않아 일을 구한 스스로가 대견했던 것도 잠시. 좀처럼 외워지지 않는 생소한 중동 음식 메뉴와 들리지 않는 뉴질랜드 악센트,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유럽의 어느 작은 나라에서 온 매니저의 인종차별이 겹쳐 한 달여 만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고대하던 거대한 자연경관 대신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을 바라보며 가파른 길을 등산하듯 오르내려야만 어딘가에 다다를 수 있는 이 도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공항을 찾았다. 목적지는 남섬의 블래넘이었다.
2. 도약을 꿈꾸며
블래넘은 드넓은 포도 농장과 큰 홍합 공장이 있어 일자리가 많기로 유명하다. 때문에 대부분의 워홀러들이 관문처럼 거쳐 간다고 하여 ‘워홀러들의 성지’로 불린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도착한 이른 아침의 블래넘 공항에는 오클랜드의 호스텔에 묵을 때 알게 되었던 한국인 동생 두 명이 마중 나와 있었다. 주렁주렁 들고 온 짐들을 트렁크에 싣고 꽤 오래된 연식으로 보이는 중고 세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얼룩덜룩 더러운 시트와 거미줄로 장식된 창문을 보며 들었던 우려와는 달리 차는 제법 매끄럽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스텔이 여럿 있는 주택가에 도착했다. 공장에서의 밤샘 근무로 피곤한 와중에도 기꺼이 발이 되어준 동생들에게 감사인사를 건네며 차에서 내렸다. 빈방이 있는 호스텔을 찾아 체크인을 하자마자 비어 가는 주머니 사정에 쫓겨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에서는 컴퓨터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각 컴퓨터마다 시간제한이 있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며 장장 몇 시간을 보냈다. 워킹홀리데이 전용 구인 사이트의 광고 글에 적힌 연락처와 이메일로 메시지나 이력서를 닥치는 대로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응답이 없거나 이미 자리가 다 찼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허탈감과 함께 허기가 지고, 잠이 쏟아졌다. 이만하면 오늘은 할 만큼 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의 저편에는 뉘엿뉘엿 지는 해가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대로변의 빵집에서 1달러 정도의 가장 저렴한 식빵 한 봉지를 사들고 나와 걸으며 빵조각을 씹었다. 우걱우걱 먹는 한입 한입에 터덜터덜 걷는 걸음걸음에 쓸쓸함과 불안감이 밀려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호스텔의 침대에서 짧은 휴식을 취한 후 바람을 쐬러 뒷마당에 나갔다. 먼저 앉아 있던 어느 여행객이 맥주 한 병을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하나둘씩 모여들어 대화를 나누던 중에 모르는 번호로 문자메시지 한통이 도착했다. 당장 내일 이사를 오면 이튿날부터 포도농장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어느 호스텔 주인의 연락이었다. 블래넘에 있는 대부분의 호스텔은 일자리를 알선해주는 것을 앞세워 워홀러들을 투숙객으로 모으는 형태다. 그중 한 곳에 마침 빈 침대가 있었고, 당장 일꾼을 구하는 인력업체에 알선이 되는 시기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리자 부러움과 축하의 말들이 쏟아졌다. 24시간을 바삐 움직인 보람을 느끼며 밤이 깊도록 축배를 들었다.
3. 가족의 탄생
문자로 안내받은 주소지에 도착하자, 겉으로 봤을 때는 호스텔인 것을 전혀 알 수 없을 법한 일반 가정집이 하나 있었다.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지 어리둥절해하며 멀뚱히 밖에 서있는 와중에 주인이 도착해서 내부로 안내했다. 공용 공간들을 지나 여성 전용 방에 들어서자 혼자 쓰기에 딱 적당할 법한 크기의 방에 벙커침대 3개가 벽을 둘러싸고 꾸역꾸역 놓여 있었다. 나머지 공간에는 길고 좁은 철제 사물함이 6개 세워져 있었다. 그 방에서 나는 독일인 1명, 영국인 3명, 말레이시아인 1명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적막하던 집은 이른 저녁 저녁이 되자 일터에서 돌아온 워홀러들로 시끌벅적해졌다. 하우스메이트들의 국적은 한국, 영국, 프랑스, 덴마크, 일본, 말레이시아, 스코틀랜드, 독일, 스웨덴으로 다양했다. 개중에는 며칠 또는 몇 주만 지내다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가족처럼 동고동락하게 되었다. 그 덕에 한 지붕 아래 식구들과의 우정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나의 영어 실력도 눈에 띄게 늘어갔다.
평일에는 새벽 5시 알람 소리와 함께 힘겹게 일어나 잠에서 덜 깬 친구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잠긴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하며 시리얼 또는 토스트 따위로 식사를 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후, 전날 미리 싸 둔 도시락과 물을 챙겨 들고 새벽의 어스름이 깔린 기차역 앞으로 집합했다. 날마다 슈퍼바이저들이 나누는 팀에 따라 회사 차, 또는 개인차를 타고 농장으로 이동해서 반나절 동안 온몸을 쓰는 노동을 강행했다.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숙소로 향하면, 단 3개뿐인 샤워실 앞에서 너 나할 것 없이 먼저 줄을 서려고 쟁탈전을 벌였다. 땀과 흙먼지에 찌든 몸을 개운하게 씻어내고 나면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며 복작복작 발 디딜 틈 없는 부엌에서 저녁밥과 함께 다음 날 챙겨갈 점심 도시락을 만들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었다. 거실에서 체스 같은 보드 게임을 하거나 때로는 영화감상을 하며 여유를 즐기는가 하면, 때가 낀 창고에 놓인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거나 다트 놀이를 하기도 했다. 밤 9시쯤이면 하나둘씩 졸린 눈을 비비며 시간차를 두고 각자의 침대로 향했다. 주말에는 늘어지게 잠을 잤고, 저녁에는 어김없이 파티를 열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근처 산이나 바다로 드라이브를 가거나 호수로 물놀이를 가기도 했다. 때때로 토요일 밤 12시가 되면 시내에 있는 클럽으로 우르르 몰려가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이러한 재충전의 시간이 있었기에 매일 근육통에 시달리는 격렬한 노동을 거뜬히 감당할 수 있었다.
4. 2017년 12월 1일
무난히 흘러가던 일상 속에 일생일대의 이벤트가 있었다. 스물아홉 번째 내 생일이었다.
생일 축하는 전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함께 사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밤, 함께 일하는 한국인 동생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밖으로 나가보니 그냥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며 손수 만든 미역국과 흰쌀밥을 불쑥 내밀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감동의 눈물을 터뜨렸고, 그들은 가만히 안아주었다.
생일날 아침, 전날 받은 밥과 국으로 든든하고 따뜻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비몽사몽으로 눈을 반쯤 감은 채 하나둘씩 주방으로 들어선 친구들이 차례로 생일을 축하하며 따뜻한 포옹을 해주었다. 친구들의 애정을 온몸으로 받고 나간 일터에서는 힘든 줄도 모르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동료 한 명은 본인이 좋아하는 글귀를 손수 캘리그래피로 꾸민 카드를, 친하게 지내던 마오리족 슈퍼바이저는 축하의 포옹과 함께 초코바를 선물했다. 저녁에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 몇몇과 함께 시내에 있는 펍으로 가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맥주를 마시며 축하를 받았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생일을 만끽한 하루였다.
숙취로 인해 오후 12시가 넘어서야 방문을 나선 다음 날은 마침 ‘National Crate Day’로 뉴질랜드에서 매년 12월 첫째 주 토요일이면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정오부터 자정까지 24병의 맥주를 마시는 날이었다. 아침 9시부터 마시기 시작했다는 몇몇 친구들은 이미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동참하여 노래하고 춤추며 놀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다. 잠시 밖에서 취기를 환기하고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영국인 친구 한 명이 문 앞을 막아섰다. 그렇게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들어선 캄캄한 거실에서는 모두가 케이크 위의 초에 불을 붙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합창하는 축하곡이 울려 퍼지며 하루 늦은 깜짝 생일파티가 열렸다. 전날 선약이 있던 나를 위한 친구들의 배려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채 촛불을 후후 불면서 남은 워킹홀리데이 기간 동안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한 여행을 하기를 빌었다. 이어서 선물 전달식이 있었다. 반짝이는 소재의 은색 종이가방을 열자 선물들이 가득했다. 레드와인 한 병과 요리책, 복슬복슬 털이 달린 분홍색 유니콘 다이어리 그리고 귀여운 회색 토끼 인형까지. 힘들게 번 돈을 조금씩 모아 마련한 선물임을 알기에 더욱 값지게 느껴졌다. 친구들의 재촉에 얼른 열어 본 다이어리의 첫 장은 한 명 한 명이 개성 넘치는 필체로 꾹꾹 눌러 담은 정성스러운 메시지로 가득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했던 그날 밤,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5. 흔한 워홀러가 사는 법
연말이 되자 하나둘씩 다른 지역으로 휴가를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호스텔은 조금씩 비어갔고 나 또한 크리스마스 직전에 블래넘을 떠났다. 포도 농장에서의 마지막 날, 평소 깐깐하기로 유명하던 중국계 슈퍼바이저는 나중에라도 돌아오면 함께 일하자며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몇몇 호스텔 친구들과 함께 미리 계획했던 대로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남섬의 인기 휴양지인 와나카와 퀸스타운에서 맞이했다.
퀸스타운에서 휴가를 즐기는 동안에는 한화 100만 원 정도의 저렴한 값을 치르고 스테이션왜건 한대를 장만했다. 손 볼 곳이 많아 찻값보다 수리비가 훨씬 많이 들고 연비가 좋지 않았지만 캠핑용으로는 적격이었다. 운전석과 조수석을 제외한 뒷자리를 눕혀 평평하게 만든 뒷좌석에 에어매트를 깔았다. 그 위에 담요를 덮고 베개와 침낭까지 놓으니 꽤 그럴싸한 침실이 마련되었다. 식기와 버너 등의 장비까지 모두 갖춘 후에는 무료 캠핑장을 전전하며 로드트립을 했다. 자주 씻지 못하는 데다 샌드 플라이에 물리기 딱 좋은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황홀한 자연경관과 함께하는 일출과 일몰 그리고 밤마다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를 감상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간혹 비가 오는 밤이면 타닥타닥 차체를 때리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기도 했다. 따로 숙소를 정해놓고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기에 오가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근처의 캠핑장을 찾아 묵곤 했다.
신나는 홀리데이를 위해 고된 워킹은 불가피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 여름에는 체리농장에서 어깨에 바구니를 메고, 몸보다 큰 사다리를 이 나무 저 나무 옮겨가며 체리를 수확했다. 겉면이 반질반질하고 통통한 체리는 따자마자 옷에 슥슥 닦아서 입으로 넣기에 바빴다. 평생 먹을 체리를 그때 다 먹어버린 탓일까? 2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체리를 먹지 않는다. 세계 수출 기업인 홍합 공장에서는 소독된 복장으로 무장하고 홍합 포장과 라벨 작업을 했다. 요란하게 돌아가는 기계음 탓에 헤드셋처럼 생긴 귀마개를 착용하고 일을 했다. 때문에 옆에 있는 동료는 물론 슈퍼바이저와의 의사소통이 어려워 소리를 지르거나 몸짓으로 대화를 해야 했다. 사과 시즌인 가을에는 팩 하우스에서 종류와 크기별로 질 좋은 사과를 골라내고 포장했다. 매일 사과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좋았지만, 반복되는 단순 작업에 시간이 정말 더디게 갔다. 뉴질랜드에서의 마지막 일터인 목장에서는 소 젖에 유축기를 꽂는 일을 했다. 1000여 마리가 넘는 소의 젖을 아침저녁으로 짜다 보니 생전 안 쓰던 쪽의 근육이 성을 내어 처음 며칠은 수저도 제대로 못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머리 위로 소똥을 맞은 적도 소의 뒷발에 걷어 차인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만두고 싶은 충동이 매 순간 들었지만 다음 여행지를 떠올리며 애써 억눌렀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사계절 내내 다채로운 액티비티를 했다. 여름에는 카이코우라의 바다에서 배를 타고 나가 돌고래와 함께 수영을 하는 체험을 하고 그 지역 명물인 크레이피시를 먹었다. 아벨타스만 국립공원에서는 눈앞에서 점프하는 돌고래들과 함께 카약킹을 했다. 퀸스타운에서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다는 134m 높이의 번지점프를 하고, 160m 상공에서 시속 124km로 타는 세상에서 가장 높고 크고 무서운 그네, 네비스 스윙을 탔다. 그네에서 내려 땅에 첫발을 디뎠을 때는 똑바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을에는 남섬의 밀포드 사운드를 드라이브하고, 근처의 유명한 등산코스 중 하나인 캐프럴 트렉을 1박 2일간 등산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경이로웠지만, 산 위의 캠핑장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청하던 밤은 얼음장 같던 바닥 탓에 이대로 얼어 죽겠구나 싶을 정도로 추웠다. 겨울에는 루지의 본고장이자 온천 도시로 유명한 로토루아에서 루지를 타고, 노천온천에서 몸을 녹였다. 와이토모의 동굴 안에서는 5시간여 동안 여러 액티비티를 체험하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별처럼 반짝거리는 글로우 웜을 감상했다. 구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스키장에서는 폭신한 자연설을 가르며 보드를 탔다. 마운트 쿡의 후커 벨리 트레킹 코스 끝자락에서는 사계절 내내 녹지 않는 빙하를 만졌다. 헬멧과 아이젠으로 무장하고 눈 덮인 통가리로 국립공원을 오르기도 했다. 돌아오던 봄에는 서핑하기 좋기로 유명한 라그란에서 서핑 강습을 받았다. 딱 한 번이지만 두 발로 보드 위에 섰을 때의 쾌감은 서핑 족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새롭고 다양한 경험 속에서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성취감을 느꼈다. 특히 무서웠던 번지점프와 네비스 스윙, 강도 높았던 포도 농장과 목장의 노동을 경험하고 하니 이 세상에서 못 해낼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한국에서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TV와 노트북 등의 기계와 가깝던 내가 뉴질랜드에서의 1년 3개월 동안은 자연을 벗 삼아 삶을 즐기는 또 다른 방식을 터득해갔다.
6. 다름과 깨달음
한국과는 달리 뉴질랜드의 많은 부모들이 자녀가 공부를 잘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길 바라지 않는다. 학생들이 학업 성적에 목매지도 않는다. 공부에 뜻이 없는 10대는 일찍이 기술을 배우거나 일을 시작해 돈을 번다. 각자 본인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진다. 직업에 귀천도 없다. 더럽고 냄새나는 작업복을 입고 식당에 가는 이들은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이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어느 누구도 눈치를 주거나 꺼리지 않는다.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것에 무게를 두고 사는 낙천적인 삶의 방식,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에게도 배타적이지 않은 열린 마음,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충분히 즐기며 살아가는 여유는 치열한 경쟁이 보편화된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 삶에 대한 태도와 문화가 그들을 경쟁으로 내몰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입식 교육을 받고 남들처럼 대학을 나와 직장을 다니던 이십 대의 나는 늘 앞만 보며 걸었다. 남이 만들어 둔 길을 따라 걷느라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살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다양한지 알지 못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이 서른에 떠났던 길, 그곳에서 어떤 날은 철저히 행복했고, 또 어떤 날은 충실히 외로웠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의 문화와 가치관을 배웠고,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진정한 자신과 대면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지금 행복한 것’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공교롭게도 나의 이십 대와 삼십 대는 뉴질랜드를 가기 전과 후로 나뉜다. 나는 좁은 세상에 갇혀 그게 전부인양 착각하며 살아가던 이십 대의 나보다 훨씬 넓은 시각과 열린 마음을 갖게 된 지금의 내가 ‘진짜’라고 느껴져서 더 좋다.
돈을 벌면서 여행을 하는 것만이 워킹홀리데이가 가진 요소가 아니다. 여행과는 다른 결을 가진 희로애락이 있다. 여행이 콩깍지가 씐 채로 달콤함을 추구하는 연애라면, 워킹홀리데이는 살을 부대끼며 때로는 보지 않아도 좋았을 면들까지 면밀히 보게 되는 동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