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비 Feb 26. 2024

거래처에서 거절당하면 기분 나쁘지 않나요?

영업사원 김대리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제약영업을 한다고 하면 많이 물어보는 것 중에 하나가 거래처에서 거절당하면 기분이 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당연한 질문이다. 살면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물론 부탁을 할 때는 많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유관부서에 업무 협조를 요청해야 할 때도 있고, 팀장님한테 기안서 결재를 요청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각자의 역할 범위와 책임 소재가 명확히 정해져있다. 10만원 이하의 예산이 들어가는 일이라면 담당자 결재, 50만원 이하라면 팀장 결재, 100만원 이하라면 사업부장 결재,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 범위 내에서의 일이라면 어차피 다 승인해준다. 그러니 제발 승인해주십쇼, 하며 읍소를 할 필요도 없다. 갑작스럽게 파산을 하거나 가족이 중병에 걸려서 급하게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아니라면 살면서 누군가에게 허리 숙여 간청을 해야 할 일은 여간해서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영업은 매일 매일이 부탁과 간청의 연속이다. 제약회사가 파는 약의 90%는 어차피 제네릭(카피약)이다. 다 똑같다. 우리 회사에서만 파는 약, 다른 어떤 약도 따라갈 수 없는 독보적인 효과를 가진 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고객인 원장의 입장에서는 굳이 우리 약을 써줘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간청해야 한다. 제발 좀 써달라고. 아이 분유값을 벌어야 한다고, 이번에 실적 못내면 지방으로 쫓겨난다고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져야 한다.(물론 그렇게까지 하는 영업사원은 내가 아는 한 거의 없다.) 그게 거절당하면 얼마나 무안하겠는가.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전혀 아무렇지 않다. 요즘 나는 하루에 20개 가량의 거래처에 방문한다. 물론 늘 이렇게 하진 않는다. 최근에 이직을 했기 때문에 지역에 대해 파악하고,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 평소보다 조금 더 빡세게 다니고 있는 중이다. 적응이 되고 나면 지금의 절반도 안 다니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중 80%의 거래처에서 거절을 당한다. 원장님 바쁘시다, 사전에 약속한 게 아니면 만날 수 없다며 문전박대를 당한다. 그런데 아무 느낌이 없다.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번에 다시 방문드리겠습니다. 고생하세요!" 하고 나온다.


내가 원래부터 거절에 익숙하고 낯짝이 두꺼운 인간이라 그런 건 아니다. 만약 압구정 로데오나 홍대에서 여자한테 연락처를 물어보라고 한다면 나는 머릿속으로 한 스무 번쯤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것이다. 거절당하면 당연히 기분이 상할 것이다. 거리에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쪽팔려서 당장이라도 도망쳐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거래처에 말을 걸 때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다. 거절을 당해도 창피하지도, 불쾌하지도 않다.


영업사원 김대리의 자아와 인간 김현민의 자아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회사에 이력서를 내면 인사 담당자는 이력서에 적힌 내 학벌과 어학점수, 직무와 직급 같은 것들을 쭉 훑어볼 것이다. 그리고 같이 일해볼만 하다 싶으면 합격 문자를, 아니라면 "귀하의 우수한 능력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문자를 보낼 것이다. 그래서 취직에 실패하면 기분이 나쁘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부정당하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자한테 연락처를 물으면 여자는 나를 위아래로 스캔할 것이다. 키는 얼마만한지, 얼굴은 어느 정도 생겼는지, 돈은 얼마나 있어보이는지, 여자는 얼마나 만나본 것 같은지 사이즈를 내볼 것이다. 그런 것들을 종합해서 내가 알고 지낼 가치가 있는 남자라는 판단이 서면 연락처를 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남친이 있어서요.. 죄송해요. 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거절은 남자에게 상처가 된다. 내 가치가 그녀의 기준에 미달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업을 할 땐 그게 없다. 프런트에 앉아 있는 간호사들에게 나는 내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MBTI가 뭔지, 자산규모는 얼마나 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내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주지 않는다. 그냥 "ㅇㅇ제약 담당자인데요. 원장님 잠시 뵐 수 있을까요?"하며 옆에 있는 병원에서 했던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읊는다. 그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유능한 담당자처럼 보인다고 들여보내주는 게 아니고, 초짜처럼 보인다고 쫓아내는 게 아니다. 그냥 원장님이 들여보내지 말랬으니까 안 들여보내는 것 뿐이다. 내가 옆에 병원에서 했던 말을 여기서 똑같이 하듯, 그들도 좀 전에 왔던 다른 회사 영업사원에게 했던 말을 내게 똑같이 할 뿐이다. 하루에 스무 번씩 문전박대를 당해도 상처를 받지 않는 건 그래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