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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비 Mar 06. 2024

고객의 니즈라는 헛소리

"잘 파는 법"류의 책들을 걸러야 하는 이유

영업 사원으로 첫 회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최고가 되고 싶었다. 단순히 매출이 잘 나오고 인센티브를 많이 받는 담당자가 아니라 업계의 페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영업이나 마케팅에 대한 책들을 탐독했다. 누구는 보험왕, 누구는 중고차왕, 누구는 제약왕. 성공한 자영업자나 이름난 기업의 오너들 혹은 경영 컨설턴트들이 쓴 책도 있었다.


저자는 다양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다 똑같았다. 결국 고객의 니즈라는 것이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자동차를 만들고 파는 입장에서는 자동차의 사양이 중요하다. 몇 cc인지, 연비는 몇km/L인지, 트렁크는 얼마나 큰지 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재미없는 수치들만 늘어놓는 광고는 망할 것이다. 고객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고객이 정말로 원하는 건 엔진이 몇 cc고, 연비가 얼마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차를 타고 얼마나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 광고들은 스펙을 나열하기보다 그 자동차를 통해 즐길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한다.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사막을 질주하는 무법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도시의 고층 빌딩 숲 사이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미녀들을 거느린 알파 메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고객의 니즈가 중요하다. 그걸 모른채 판매자의 입장에서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정보들은 고객의 입장에서 듣기 싫은 소음에 불과하다.




맞는 말이다. 제약 영업을 하는 내 입장에서 고객은 의사다. 그들은 자영업자다. 시간을 들여 진료를 보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바꿔말하면, 그들에게 시간은 돈이다. 그들이 나와 5분 동안 대화를 한다는 건 환자를 보고 돈을 벌 수 있는 5분을 나에게 할애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 이상을 줘야 한다. 적어도 5분 동안 환자를 봐서 받을 수 있는 수가보다는 값진 정보를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고객의 니즈를 알아야 한다. 고객인 의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그들의 입장에서 가치있는 정보를 줄 수 있다. 그걸 할 줄 안다면 그 다음부터는 식은죽 먹기다. 진료를 보는 것보다 영업 사원과의 대화가 더 값지다고 느낀다면 어느 원장이 그 영업 사원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걸 아까워하겠나? 어느 원장이 그 영업 사원이 파는 약을 안 쓰겠나?


하지만 대부분의 영업사원들은 그걸 모른다. 그래서 지들 할 말만 한다. 저희 제품은 이런 점이 좋아요. 원장님, 이번에 저희 약을 써주시면 매달 얼마씩 드릴게요. 병원 앞에 자주 가는 식당 있으시죠? 거기에 매달 얼마씩 결제해드릴게요. 하는 이야기들. 하지만 그건 원장의 입장에서는 스팸 메일이나 유튜브 영상 시작 전에 나오는 5초 짜리 광고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최고가 되지 못한다. 인센티브를 받아보려고, 팀장의 실적 압박을 이겨내보려고 발버둥치지만 고객에게 접근하고 말을 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지 못하니 제자리 걸음이다. 고만고만한 방식으로 고만고만한 실적을 낼 뿐이다.




하지만 영업을 실제로 해보면 알게 된다. 그건 개헛소리라는 걸. 영업왕이라는 사람들이 쓴 책을 보면 고객의 니즈, 그것도 가장 심층적인 곳에 있는 내면의 결핍을 공략하여 고객을 자신의 광팬으로 만든 사례들이 나온다. 누구가에게는 동료와의 관계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커리어에서의 성공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고객이 처음 보는 영업 사원 앞에서 자기의 근원적인 결핍을 드러내겠나? 돈을 내고 심리상담을 받으러 온 거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다. 자기가 원하는 걸 솔직히 드러내야 상담사로부터 근본적인 솔루션을 받고, 상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업 사원과 고객인 의사의 만남은 그런 게 아니다. 만나자고 한 건 영업 사원이고 그걸 받아준 건 의사다. 영업 사원이 병원에 들어가서 프런트에 앉아 있는 간호사에게 면담을 요청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만남이다. 그러니까 의사가 갑이고 영업 사원은 을이다. 갑이 을에게 자기의 패를 까보여야 할 이유는 없다. 어느 영업 사원이 고객인 의사의 의중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춤 대응을 하겠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의사가 먼저 말하길 기다리고 앉아 있으면 의사는 말할 것이다. 


할 말 없어요? 왜 온 거에요?




그러니까 일단 내가 할 말을 먼저 하는 수밖에 없다. 저희 꺼 써주시면 무엇을 얼마만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뭐라도 반응이 올 것이다. "저희는 그런 거 안 받아요" 아니면 "다른 회사는 더 주던데요?"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한 문장이라도, 10초라도 더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그렇게 해서 원장이 원하는 걸 알아내려고 애처로운 아무말 대잔치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나가라고 하면 다음번에 또 와서 똑같은 짓을 또 하는 것이다. 고객의 니즈라는 건 그렇게 뺑이를 치는 과정에서 하나 알아낼까 말까 한 것이지, 책 몇 자 읽었다고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고객의 니즈가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영업 사원은 없다. 자기 할 말만 하는 게 영업의 왕도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영업 사원도 없다. 그런데도 다들 지 할 말만 하는 건 그래서다. 남들이 다들 그렇게 하는 건 남들이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것 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렇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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