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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비 Mar 10. 2024

연대 나온 김대리

연대 나와서 제약 영업을 하면 듣게 되는 말들

신규 거래처, 처음 보는 원장과의 대화는 늘 어색하다. 만나자마자 제품 얘기부터 하면 물건 팔러 온 게 너무 티가 나고, 그렇다고 대뜸 사적인 걸 물어보려 하면 “피차 바쁜 사이에 쓸 데 없는 얘기 말고 본론만 말씀하시죠?”하는 싸늘한 반응이 돌아올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 아쉬운 건 내 쪽이니. 그런데 무슨 말을 하지? 잘 모르겠다. 그러면, 일단 무난하게 가자. 가장 뻔한, 다른 거래처에서도 수십 번을 반복했지만 딱히 탈이 난 적은 없었던 말.


“안녕하십니까? ㅇㅇ제약의 김현민입니다. 저희 회사 담당자가 예전에 방문드린 적이 있었나요? 아, 없으셨다구요? 한동안 담당자가 공석이었는데 앞으로는 자주 방문드리면서 도움 드릴 수 있도록...”

“신입이야?”


원장이 이렇게 묻는다. 괜찮은 반응이다. 원장이 무언가를 물어본다는 건 이 대화를 더 이어나갈 의향이 있다는 뜻이다. 그게 사적인 질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며 똑같은 얘기를 하는 똑같은 복장의 영업 사원이 아니라, 감정과 개성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 원장에게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보톡스 회사 다녔는데 제약 회사에서 영업하는 건 처음입니다.”

“어디 대학 나왔어?”


흐름이 좋다. 오지랖이 넓고, 텐션이 높으며, 약간의 양끼가 있는, 흔히 생각하는 영업 사원의 스테레오 타입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쯤에서 명문대를 나왔다는 사실을 밝히면 더 호감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장 같은 옛날 사람이라면 더더욱.   


“연세대 행정학과 나왔습니다.”
“서울?”
“네, 서울입니다.”
“요즘 그렇게 취업이 어렵나? 제약 영업이 쉽지 않을 텐데.”
“예전에는 사무직으로도 일했었는데 영업이 더 적성에 맞아서 다시 하고 있습니다. 사무직 할 때보다 개인 시간도 많고, 인센티브도 받을 수 있어서 더 좋습니다.”

“그래도 어른들 생각은 다르지. 부모님이 걱정 많으시겠다. 여기서 적당히 돈 벌고 다른 시험 같은 거 준비해.”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오갔다. 당장 약을 써주지는 못하겠지만 종종 와서 놀다 가라는 답을 받았다. 이 정도면 고무적이다. 날 좋게 봤다는 뜻이다. 계속 관계를 이어나가면 언젠가는 고객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래처를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이 회사에 만족한다. 일이라는 건 결국 내 시간을 팔아 돈과 바꾸는 일이다. 그러니 좋은 직장이라는 건 별 게 아니다. 적은 시간 일하고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면 장땡이다. 여긴 그게 된다. 그러니 오래 버틸 거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벌면서. 그렇게 인생의 2막을 준비할 거다. 나는 대기업 사무직으로 일하는 대학 동기들보다 뒤처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패배자라고 생각하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당당하다.


그런데 원장이 마지막에 했던 말.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시겠다, 옛날 사람들 생각은 그렇다는 말이 마음에 얹혔다. 그렇지. 옛날 사람들 생각은 그렇지.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옛날 사람들이지. 옛날 사람들 보기에 제약 영업은 원장이랑 같이 룸살롱 드나들면서 술 시중 들어주고 알랑방귀 뀌는 일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연세대 행정학과 나온 아들이 할 일은 아니지.


그러니 부끄럽겠지.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사무직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고 해도 부모님은 연대 나온 아들이 제약 영업하고 있다고는 말 못하겠지.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옛날 사람일 테니까. 그 옛날 사람에게 제약 영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결국 나는 남들 앞에 내놓기 부끄러운, 걱정만 끼치는 자식인 거겠지.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하고는 전혀 상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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