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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비 Mar 13. 2024

영업사원 김대리, 거래처에서 쫓겨나다.

지나친 절실함은 독이 된다.

병원에 들어선다. 예전에도 두어 번 방문했지만 면담거절 당했던 곳이다. 아예 원장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프런트에서부터 퇴짜를 맞았던 곳이다. 이번에도 아마 안 될 거다. 그래도 지나가는 길이니까, 혹시 모르니까 한번 물어보기나 해보자. 하며 들어선다.


그런데 들어오란다. 그것도 지금 바로.


‘어? 된다고? 지금? 이건 예상 못했는데? 잠깐! 가방에서 브로셔 좀 꺼내야 하는데?’


하면서 허둥지둥 원장실에 들어간다.




마른 체구에 짧은 머리, 까무잡잡한 피부.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이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긴장이 된다. 이럴 때는 플랜A, 제일 무난한 걸로 간다.


나 : 안녕하세요, 원장님? ㅇㅇ제약 김현민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새로 맡게 되어서 인사드릴 겸 방문했습니다. 저희 회사 담당자 만나보신 적 있으신가요?

원장 : 질문하지 말고 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나 : 아,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이번 달까지만 진행하는 프로모션이 있어서요.”

원장 : 프로모션? 그게 뭔데요?

나 : 네, 이번에 저희 제품으로 처방을 해주시면 그 처방량에 맞춰서...

원장 : 저희는 그런 거(돈) 안 받아요.

나 : 아, 원장님. 뭐 위험한 걸(돈) 한다는 뜻은 아니구요. 회사의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서 원장님께 피해가는 일 없게...

원장 : 그런 거 제안하는 영업사원하고는 다시는 안 만납니다.

나 : 죄송합니다, 원장님. 제가 결례를 범했네요.

원장 : 다신 오지 마세요.


병원에서 쫓겨나듯 나온다. 지금까지 수백수천 곳의 병원에 들어가고 나왔지만 이런 건 처음이다. 안 사면 안 산다고 하면 그만이지 이렇게까지 할 건 뭐란 말인가.




차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지? 무례하게 굴었나? 아니다. 발끈해서 언성을 높이지도, 건들거리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 충분히 신뢰 관계가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프로모션을 제안한 게 문제였던 건가? 근데 용건만 말하라며? 초면에 그런 얘기부터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건 나도 알지. 원장이 정말로 원하는 게 돈일지라도, 내가 줄 수 있는 게 돈일지라도 서로를 충분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그걸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건 금기인 거 알지. 그런데 용건만 바로 말하라고 했잖아? 나는 ‘저희 회사 담당자 만나보신 적 있으신가요?’하고 물으면서 회사 소개를 먼저 하고, 천천히 접근하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먼저 질문하지 말라고 했잖아? 용건만 말하라고 해놓고 용건을 말했더니 쫓아내는 건 무슨 상황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원장 탓을 할 수는 없다. 원장은 우리 회사 약을 쓰건 안 쓰건 상관이 없지만 나에게는 매우 상관이 많다. 원장이 우리 약을 써줘야 매출 실적이 올라가고, 인센티브도 많이 받고, 승진도 하고, 회사 내에서 인정도 받을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나는 매달리는 쪽이기 때문에 을이고, 원장은 매달릴 필요가 없는 쪽이기 때문에 갑이다. 그게 중요하다. 누가 잘못했고 잘했는지보다는 누가 강자이고 약자인지가 중요하다.     


결국 그게 문제였다. 너무 절실했다. 나에게는 쫓겨나지 않을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라는 원장의 말에 그냥 카탈로그만 건내주며 바쁘신 것 같으니 찬찬히 훑어보셔라, 다음번에 시간 있으실 때 자세히 설명드리겠다, 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면 프로모션이 뭐냐고 원장이 되물었을 때, 그냥 원장님들께서 혹시 필요로 하시는 게 있으면 최대한 맞춰드리겠다, 하는 식으로 에둘러 말할 수도 있었다. 혹은 그런 거 안 받는다고 말했을 때 위험한 거 아니고, 적법한 절차대로 할 거라고 굳이 변명을 하기보다 ‘아, 알겠습니다.’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땐 그 생각을 못했다. 절실해서였다. 아침부터 열댓 군데의 병원에 가서 거절을 당했다. 당연히 하나도 못 팔았다. 그런데 퇴근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 퇴근시간이 되면 팀 단체 카톡방에 오늘의 활동 내용을 올려야 한다. 열댓 군데 가서 거절만 당했다, 그래서 하나도 못 팔았다, 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마지막에 들어간 거래처에서 원장을 만나는데 성공했다. 그것도 예전에 몇 번 방문했지만 거절당했던 거래처에서.


그 절실함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꼭 오늘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건 아니었는데, 오늘은 적당히 운만 띄우고 다음번에 다시 와서 얘기해도 되는 거였는데 그 생각을 못하게 만든다. 마치 다음번에 다시 오면 병원이 이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4박 5일 휴가를 나와서 여자 친구를 만들려는 군바리처럼, 인터넷 쇼핑을 하다 평소 갖고 싶던 상품에 매진 임박이 뜬 걸 봤을 때처럼 조급해진다. 그래서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러다 보면 쫓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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