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나는 솔로에 나갔을 때 나는 스스로를 제약회사 영업 사원으로 소개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아니었다. 의료기기 회사 영업사원이었다. 감기약이나 항생제, 소화제를 파는 제약회사가 아니라 보톡스나 필러 같은 의료기기를 파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제약 회사로 옮긴 건 올해부터다. 반년도 안 됐다.
속이려고 한 건 아니다. 그땐 비슷한 건줄 알았다. 병원에 다니며 의사를 상대로 무언가를 파는 일이니 그게 그거라 생각했다. 약을 파는 것과 의료기기를 파는 건 그렇게 큰 차이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제약영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다르다. 6년 넘게 의료기기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나는 원장이 사는 동네가 어딘지, 자녀가 몇 살 정도 되었는지, 취미가 뭔지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너무 대놓고 물어보면 무례해보일 수 있으니 은근슬쩍 떠봐야한다. 주말은 잘 보내셨나요? 아, 그냥 집에 계셨다구요? 요즘 날씨가 좋아서 라운딩 나간다는 원장님들도 많으시던데? 아, 야외 활동은 별로 안 좋아하신다구요? 그럼 집에서 쉬실 때는 보통 책을 읽거나 하시는 편이신가요? 이런 식으로.
그게 제약영업과 의료기기 영업의 차이인 것 같다. 의료기기는 병원에서 원장이 직접 사서 쓰는 거다. 보톡스나 필러를 사서 환자에게 직접 주사해야 한다. 그러니 제품 자체가 중요하다. 가격이 싸면 마진을 많이 남길 수 있고, 양이 많으면 여러 명의 환자에게 나눠서 쓸 수 있고, 효과가 좋으면 입소문이 나서 환자가 늘게 된다. 그러니 제품에 대한 얘기를 하면 된다. 이건 얼마고, 뭐가 장점이고, 얼마까지 깎아줄 수 있고, 하는 얘기면 충분하다.
그런데 제약영업은 다르다. 다 똑같은 약이다. 성분도 같고 용량도 같고 제형도 같고 복용 가이드도 같은 약이 수십 수백 가지가 있다. 그러니 제품 이야기를 해봐야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원장이 더 잘 안다. 심지어 가격 조차도 의미가 없다. 의료기기는 의사가 사는 거지만 약은 약국을 거쳐 환자가 사는 거다. 그나마도 대부분의 약은 보험 급여가 적용되어 30%의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환자 입장에서 가격 차이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약국에서 감기약 처방을 받았을 때 3500원이 나왔는지, 3700원이 나왔는지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그러니 약 얘기만 해선 안된다. 대신 나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 회사 약이 제일 좋다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원장님께 가장 진심이라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 회사 약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나를 믿어서 우리 약을 쓰는 게 되어야 한다.
그게 어렵다. 오늘은 또 무슨 얘길 해야 하나, 단답으로 대답하면 어떡하나, 니가 그걸 알아서 뭐하냐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병원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여야 한다. 대화가 생각한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긴장한 탓에 엄한 소리를 해서 분위기가 싸해지면 병원을 나와서 뒤통수를 벅벅 긁어야 한다. 그게 이 직업의 고충이면서 묘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