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주에는 어디 가지?
브런치에 올리는 글 주제에 대해 틀이 있었다. 에세이나 수필 형식의 내 생각을 쏟아내는 내용의 글 위주로 이뤄졌다. 글을 쓰다 보면 내 일상이 모두 소중하게 여겨진다. 글로 남기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시간이 흘러 가치가 달라진다.
가족 여행이나 나들이는 브런치에 글로 남겨본 적은 없다. 블로그에 쓴 적은 있었다. 그러나 블로그와 브런치 글 쓰는 관점이 다르다. 블로그에 쓸 때는 유용한 정보가 담겨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편하게 내 생각을 써 내려가질 못한다. 그래서 여행 이야기를 어느 곳에 저장할지 난감해하곤 했다. 글로 남길지 말지 고민만 하다가 내 소중한 추억이 사라질까 저어되어 브런치에 옮겨본다.
내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브런치 공간에 작고 소박한 일상을 자주 담아보려 한다.
요즘은 일상이 편안하다. 고3 딸아이는 대학 결과를 기다리고 있어서 별다른 압박감이 없다. 중학생 둘째도 아직은 공부 스트레스도 덜하고 방학이기도 해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사실 요즘은 부모가 아이들과 놀아주기보다는 아이들이 부모의 소원을 들어주는 상황이 되곤 한다.
"아빠, 엄마랑 000 갈까? 너희들 혹시 주말에 시간 되니?"
하면서 아이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한다. 다행히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존중해서 선약을 조정해본다.
일언지하에 부모의 청을 거절하면 어떡하지 싶은 염려가 들 때도 있다.
주말여행 일정은 동대문 투어이다.
헌책방 거리와 광장시장 빈대떡을 먹기 위해 가려는 거다. 아이들 어릴 적 가본 적 있는데 다시 가고 싶어졌다.
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지 고민하다가 지하철로 이동해서 종로 3가에서 내렸다. 핸드폰 지도를 참고 삼아 광장시장에 도착했다. 예전보다 시장 내부는 훨씬 깨끗했다. 정돈된 느낌이 들었고 시장 통로에 사람이 가득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번에 시장 곳곳을 보니 새로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특히 육회 식당이 많았다. 근처 마장동이 있어서 신선한 소고기 공급이 가능한가 보다. 좁은 골목에 위한 육회 식당들 앞에 사람들이 수십 명씩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시장이 빈대떡과 마약김밥으로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전날 저녁 집에서 육회를 먹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사 먹는 것은 나중으로 미뤘다.
광장시장에 온 주목적인 빈대떡을 먹기 위해 적당한 점포를 찾아보았다. 웬만한 곳은 모두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그나마 빈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 앉았다. 빈대떡과 마약김밥, 떡볶이를 시켜서 허기를 채웠다. 원래 광장시장 빈대떡은 기름에 튀기듯 부쳐낸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한 장을 먹으면 맛있지만 더 먹으려면 속이 느글거려서 더 먹기 힘들다. 우리 가족이 찾은 식당의 빈대떡은 기름기가 쫙 빠진 평범한 것이었다.
맛에 대한 큰 감동은 없었다. 다만 그 순간이 마냥 즐거웠다. 가족이 함께 왁자지껄한 시장통에서 소박한 음식을 즐기면서 보내는 시간이 소중했다. 아이들과 앞으로는 많은 시간을 보내기 힘들고 헤어지는 연습이 필요한 시기이다.
남편이 가장 가고 싶어 했다. 예전에 가 봤는데 다시 가서 찾아보고 싶은 책이 있다고 했다. 동대문은 인근에 모두 걸어서 갈 수 있는 곳들이 많아서 관광의 선택 폭이 넓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느 곳이든 편하게 찾아서 다닐 수 있으니 나 같은 길치에게는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다.
헌책방 거리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몇 군데 책방이 열려 있었다. 가게 앞에 진열되어 있는 책들만 눈으로 대충 훑듯이 구경했다. 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여유롭게 책을 구경하기는 힘들었다. 내가 평소에 갈망하는 작가나 작품이 없으니 어느 기준으로 책을 찾아야 할지 난감했다.
'공부란 무엇인가' 작가인 김영민 교수님은 헌책방거리에서 절판되거나 초판으로 인쇄된 책을 발견하면 기뻐라 하면서 구입해서 읽곤 했다고 한다. 요즘은 읽고 싶으면 쉽사리 인터넷 주문으로 책을 배달시키거나 도서관에서 편하게 책을 빌려볼 수 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헌 책방에 즐비한 책이 단순히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책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구하기 힘든 귀중한 보물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 과거 헌책방을 자주 가는 사람들은 헌 책방에 빽빽하게 쌓인 책 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의 흐름을 즐기는 것이었을까.
책 구경을 하다가 난 의외의 책을 발견했다. 그동안 너무 사고 싶었던 만화책이 떡하니 매장 앞에 놓여있었다. 윤태호 작가의 '미생'이다. 깨끗하게 박스채로 전권이 노끈에 묶여 있었다. 예전에 사고 싶었지만 원가 대비 할인율이 높지 않아서 사질 못하고 있었다. 이미 2번 정도 읽었지만 왠지 소장하고 싶었다. 만화책을 즐겨보질 않지만 이 책만은 잘 두고 가끔씩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세트로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득템 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서 저만치 있던 남편과 둘째를 바라보았다. 둘째 아이에게 필요한 영어과학책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남편이 책을 발견했다. 그런데 아이가 일언지하에 책 구입을 거절했다. 너무 두꺼워서 본인은 보질 않을 거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아이 영어와 과학에 수준에 비해 부담이 될 수 있는 거였다. 그런데 남편은 아이가 두 번 생각해보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고 속이 상했다. 다음 일정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내고 있었다.
이럴 때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남편과 아이들 중 누구 편에 서서 상황을 조율할 것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한쪽에 기분을 맞춰주면서 억지로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거꾸로 왔던 길로 돌아갔다. 가족 4명이 내 뒤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바삐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집에 가자고 한마디 내뱉고 무작정 걷기만 했다. 조용히 둘째가 잠깐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 아빠 입장에 대해 조용히 설명해주었다. 아이가 받아들였는지 어떤지 난 알 수 없다. 그저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렇게 해야만 할 듯했다.
한참을 걷다가 남편 얼굴을 살폈다. 기분이 좀 누구러진듯해서 조심히 물어보았다. "어디로 가고 싶어?"
남편은 화가 다 풀린 건 아니지만 현명한 입장을 보이려고 나름 애썼을 거다. 가족 나들이를 망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깐. 마침 가는 도중 자그마한 카페가 있었다. 평소 같으면 맛난 간식을 먹을 시간이었는데 분위기를 망쳐서 속이 출출한 내색도 다들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카페에서 군고구마를 팔고 있었다. 따뜻한 군고구마와 차가 어우러져 어색한 분위기가 다소 풀렸다.
다행히 다음 행선지에 대해 남편이 한마디 했다.
조선시대 옛 조상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난 사실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거다. 종묘 말로만 들었지 뭘 하는 곳인지 알지 못했다. 직접 둘러보니 자세히 알게 되었다.
현재는 신위를 모셔놓은 정전의 보수공사 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왕과 왕비의 위패를 보관 중인데 광해군과 연산군만이 빠져있다고 한다. 또한 공적이 뛰어난 신하들의 이름도 깊게 새겨져 있었다. 몇백 년이 흐르도록 후손들이 그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해 보였다. 그 어디에 내 이름을 남기는가는 실로 대단한 일이다. 역사책이나 드라마에서 언급되던 왕이나 충신들의 이름이 종묘에서 보니 인물에 대한 실존 여부가 더 크게 다가왔다.
종묘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곳에 직접을 발을 들여놓고 구경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 일정은 큰 딸이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날이 조금씩 쌀쌀해졌지만 걸어 다니기에 무리가 없었다. 20분 정도 걸어가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동대문 일대는 역사탐방의 거리이다. 가까운 곳에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 줄 몰랐다. 그저 동대문 쇼핑센터만 다니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볼만한 가치 있는 장소가 즐비했다.
마침 우리가 창경궁에 도착했을 때 문화해설이 시작되려는 시간이었다.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투어였다. 처음에는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일단 합류했다가 상황 봐서 자유롭게 빠져나가려고 했다.
문화해설사 분을 따라가면서 장소 곳곳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역사적 고증을 거친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창경궁의 뼈아픈 역사를 들으면서 일제의 만행에 다시 분노하게 되었다. 일제 치하에 창경원이라는 놀이터 개념으로 바꾸면서 많은 궁궐 내 건물이 파괴되었다. '궁'이라는 공간을 일반인들이 쉽게 넘나들게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개조해버린 거다. 옛 창경궁 터를 기준으로 보면 훨씬 많은 건축물이 있었다고 한다.
각 공간마다 머물렀던 왕과 왕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공간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보게 되었다. 수년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와본 적이 있지만 무심코 가볍게 둘러보기만 했다. 각 장소마다 담겨있는 역사적 행적을 알 수 없으니 건축물을 보더라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학예연구원들의 오랜 시간 연구해 온 결과물을 지금 우리들은 편하게 말로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다음에 다른 장소에서도 전문 문화 해설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말아야겠다. 남편과 큰아이는 역사를 좋아해서 더욱 흥미롭게 투어에 참여했다. 둘째와 나는 평소에 역사에 그다지 관심이 많질 않았는데 이번 창경궁 투어는 눈과 귀를 집중에서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즐겁게 창경궁 투어를 마치고 대학로에 가서 활기찬 밤문화를 즐기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대학로를 여러 번 가봤지만 그런 곳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맛있는 딤섬으로 저녁식사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더 크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까 안타깝다. 매주마다 남편과 나는 아이들과 어디 갈까 고민한다.
다음 주에는 어디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