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시 May 28. 2023

오만한 자들이나 구원을 외치지

서머싯 몸. 『면도날』. 민음사(2009)

    『달과 6펜스』를 귀가 닳도록 들어봤지만 사실 초면입니다, 작가님. 이 책이 우리의 첫 만남이에요. 2023년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으로서 당신의 여성관은 정말 처참할 정도지만(이사벨을 향한 핥는 듯한 시선 좀 거두시죠) 그럼에도 당신이 글을 잘 쓴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네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명제이지만 부정하고 싶은 마음 역시 사실인걸요. 근데 글을 참 잘 쓰세요. 소설 뿐 아니라 극작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하셨다는데, 네. 글을 많이 쓰셔야 했겠어요. 이 작품조차도 당신이 다른 인물들과 나눈 대화를 직접 들려주니, 는 우리집 침대가 아니라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것 같았거든요.


  아주 매력적인 미국의 젊은 남녀 래리와 이사벨은 파혼을 앞두고 있다. 부유한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냈으며, 서로를 반려자로 여기고 있을 만큼 애틋한 사이지만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래리가 전쟁에서 돌아온 후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처럼 시간을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려면 그래도 번듯한 일자리는 가져야지' 하지만 래리는 도무지 그러고 싶지 않다. 자꾸만 자신의 마음 속을 파고들어간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래리를 설득하려던 이사벨이지만 래리의 변해버린 모습을, 그녀에게 한 제안을 받아줄 수는 없다. 그녀 역시 그녀의 삶을 양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제안하는 삶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풍성한지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당신에게 알려줄 수만 있다면... 그건 정말 끝없는 즐거움이고, 말로 형언하기 힘든 행복이야.."
"하지만 래리, 그거 알아? 당신은 나한테 맞지도 않는 삶을 요구하고 있어. 난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이라구. 당신이 말하는 삶은 시시해. 래리, 당신은 남자니까 남자다운 일을 하란 말이야."
 

  결국 래리와 이사벨은 파혼한다. '귀족'과도 같은 이들이라면 응당 누릴 삶을 거부하고 벗어나려 하는 래리를 주변에서는 이해할 수 다. 기다릴 수도 없다. 래리는 떠나고, 남은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꾸려간다. 리는 광산에 가 일을 하며 동료에게 철학을 배우기도 하고, 인도로 가 명상을 배우며 깨우침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이사벨은 자신을 사랑하는 부유한 남성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으로 꿈꿨던 모습들을 실현시킨다.


  엘리엇, 그레이, 소피, 수잔 등 래리와 이사벨 그리고 작중 화자인 서머싯 몸을 통해 이어지는 인물들은 각자 자신이 선택한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어떤 인물이 등장하면 순식간에 그 인물의 이야기에 몰입이 되어 어느 삶에 비중을 둘 지 쉽사리 정할 수 없게 된다. 욕망에 솔직하고, 열정적인 이들의 모습을 보면 누구든 응원하게 될 것이다.


  이 든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중 화자는 바로 작가인 서머싯 몸 그 자신이다. 명성과 부를 갖춘 여유로운 중년의 몸선생님은 '작가' 특유의 통찰력 때문인지, 작중 인물들에게 인기 폭발이다. 아무한테도 안한 얘기라며 자신을 붙들고 얘기하는 인물들의 대나무숲이 된 걸 보면 완충지대이자 중립지대로서 작용한다. 하지만 몸선생 역시 삶을 살아내는 한 명의 사람일 뿐이다. 자신의 상황과 처지에서 삶의 단면을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몸선생 역시 인물들이 보여주는 단면(어쩌면 아주 약간의 그림자까지)만 볼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저 경험을 이야기로 전달하는 능력만 조금 더 뛰어날 뿐이다. 구원자는 될 수 없다.


  매서운 바람에 스러지는 풀처럼 고깃덩어리가 되버린 시체는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의 위협을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한다.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이유, 인간의 삶의 의미에 대해, 대단히 소중하고 아름답고 위대한 건 줄로만 여겼던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허상의 것임을 알게 되며 뿌리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한다.

  실제로 삶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쯤은 되겠지?)이고, 우리가 이룩한 모든 위대한 문명들은 자연 앞에 무력하다. 개인의 삶은 이 세상에 어떠한 의미도 되지 못한채 꺼질 것이다. 그래서 삶을 살아가려는 이는 1. 삶의 의미는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살거나 2.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야한다. 대부분은 '행복한 삶'이라는 굉장히 추상적인 목표를 세워 저마다의 방식과 시간을 들여 탐구한다. 사회가 제시한 행복한 기준은 편하고, 안정적인 행복을 보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성향과 맞으리라는 보장은 없고, 맞지 않는다면 폭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몸선생의 이번 작품이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왜 살아야할까, 무얼 위해 살아야할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나는 답이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래리나 몸선생이나 나나 무척이나 성향이 비슷하고,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아닌 척 자신들의 답이 제일 낫다고 생각하는 '학'같은 부류지만... (독서모임에서 명예 래리라며, 호를 래리(올 래, 이치 리? 없지만 웃김ㅎ)라고 지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하튼 다양한 삶을 보여주고 또 틀리지 않았으며, 그저 살아가는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을 마주하고 살아내는 사람이 내가 될 수 있길 바라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기도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광기: 행복을 위한 용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