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잘 돌아가면 되는 걸까?
일을 하며 경험했던 것 #1
디자이너로써 처음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됐을 때의 일이다. 내가 상상했던 디자이너와 현업에서의 디자이너는 너무 달라서 괴리감이 많이 들었다. 내가 먹기위해 만드는 점심은 계란 대신 우유를 넣든 오리 알을 넣든 나만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면 되는데 누군가에게 그 음식을 팔아야 한다면 그건 아예 다른 얘기가 되는 것처럼, 현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건 혼자 구상하고 스케치를 한 뒤 바로 실행에 옮겼던 개인작업과는 비교 조차 할 수 없었다. 멋있는 공연을 보고 나서 그 과정 또한 우아하고 평온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지 못했었다. 일이라는 것이 그랬다.
그래서 그때는 일만 잘 돌아가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웃풋을 소비하는 건 내가 아닌데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의견을 말해도 될까? 내 의견이 틀렸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어 더 좋은 의견이 있더라도 머뭇거리고 말을 하지 못했었다. 모두가 물 흐르듯 일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나 따위의 의견은 그저 '잘 돌아가는 일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질까 봐 말 하지 못 한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어렵게 의견을 얘기해도 클라이언트의 의견과 상충되거나 의사 결정권자들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 의견은 뒤로 밀려났었기 때문이었다. 사용성이나 접근성의 문제였다면 모를까 취향의 이유라니, 그게 그렇게 중요한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근거와 이유는 충분했지만 그것을 설득할 수 있는 내공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정해진 텍스트와 정해진 취향대로만 작업하게 됐고 '나는 어도비 툴을 대신해주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출근길 직장인들처럼 데드라인 역시 여유가 없었기에 일정을 맞추는 것에 포커싱 되어 있었고, 그런 이유에서 놓치게 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외에도 문제는 많았다. 정해진 시간내에 아웃풋을 내놔야 하는 입장에서 예쁜 느낌, 화려한, 모던한, 심플한데 화려한 느낌 등의 형용적인 표현은 당장이라도 집에 가고 싶은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지금이야 각각의 느낌이라고 하는 것들이 뭘 표현하고 싶다는 것인지 어느 정도 경험으로 쌓인 데이터가 있지만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던 당시에는 고구마 10개를 물 없이 먹은 듯한 답답함을 느끼면서 마치 스무고개를 하듯이 원하는 느낌을 대신 찾아주곤 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디테일한 기획서는 생각을 갇히게 만듭니다.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제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은 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결정권을 주세요"
"저의 생각은 ~ 때문에 ~라고 생각 합니다. 그런 이유로 조금 더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A 인데요. 괜찮으시다면 관련해서 논의를 해볼 수 있을까요?"
"취향에 맞추는 것도 좋지만 프로젝트의 목적에 맞는 고민도 같이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유를 말씀드릴 테니 설득하는 일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현실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저와 먼저 논의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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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분히 필요한 요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답답한 상황들을 계속 겪게 됐던 것 같다.
과연 맞은편 부장님의 고집, 클라이언트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게 정답일까? 물론 중요하지만 취향은 프로젝트의 성과와 비례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의 취향만 좇다 보면 어느새 산속에 와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이 일을 그만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될지도 모른다. 프로젝트의 큰 프로세스 안에서 일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내가 생각한 의견이 틀릴 수 도 있지만 그게 두려워서 아무런 말도 못 한다면 지금 상황에서 더 나아질 건 없다. 만약 틀렸다면 어떤 이유로 틀렸는지 놓친 부분은 뭔지 확인하고 다음에 더 보완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니 근거와 논리가 충분하다면 강단 있게 설득하자. 내가 생각한 것이 프로젝트의 맥락과 맞다면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당당하게 요구하는 디자이너가 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