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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고 책 Mar 15. 2021

7. 맞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면....

'나는 아동폭력의 생존자입니다'

   어떤 누군가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 안에 감춰져 있는 그늘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 그늘이 왜 만들어졌는지, 
그걸 어떻게 품어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그늘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만약에 상처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써온 그 사람의 시간들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분명 상대방을 이전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다른 사람에게 저를 더 깊이 사랑할 기회를 주지 않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사람 중에서 온전히 저의 그늘을 보여준 경험은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적으니까요. 어쩌다 나를 더 알고 싶어 하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여지없이 뒤로 물러나 도망쳤습니다. 내 속에 이렇게 못난 내가 있다는 걸 들키면 그나마의 관계마저 깨져버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언제나 저는 상처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전전긍긍해 왔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속을 들여다볼 용기조차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쓰게 된 브런치 덕분에 저는 조금 어른스럽게 제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됐습니다. 저의 단점들이 어디서 비롯됐고 어떻게 나를 괴롭혀 왔는지 비로소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거지요.   

   

  이 변화들이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꼭꼭 감추고만 싶었던 기억들을 묵묵히 읽어주시고 보듬어주신 덕에 저는 조금 성장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제 마음대로 폭주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속 얘기를 털어놓은 것이 처음이거든요. 그게 얼마나 시원한 건지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탈탈 털어놓기로 마음먹었어요. 이렇게 말이지요...      




    어린 시절 부모의 폭력과 폭언 속에서 자란 아이는 결점이 아주 많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사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일 뿐이에요.)     


  먼저 지나치게 상대방의 눈치를 보는 편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 늘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피게 됩니다. 특히 나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수직적인 관계, 예를 들면 선생님이나 선배 혹은 직장 상사에게는 필사적으로 예쁨을 받고자 노력했던 것 같아요. 반면 수평적인 인간관계에 서는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여왔는데요,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걸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인간관계에서 늘 극과 극을 달려왔네요.      


  한편으로는 싸움이라는 걸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어려서부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폭언과 폭력에 일방적으로 시달리다 보니,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줄도 지혜롭게 풀어갈 줄도 모르는 거죠.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내 등 뒤에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항상 참아내거나 그 상황에서 도망치거나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행복해지는 쪽보다는 불행해지는 쪽에 더 끌리며 살아온 것 같아요. 어쩌다 찾아오는 행복보다는 불행한 나 자신이 훨씬 더 익숙한 거죠. 동전의 양면처럼 달라붙어 있는 게 행복과 불행이라면 굳이 불행 쪽을 뒤집어서 들여다보며 자기 연민에 빠져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끝이 없는 깊은 우물 속에서 허우적대던 제게 남편이 다가왔습니다. 남편 역시 저 못지않게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서 아마도 그런 점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남편은 저를 우물에서 건져주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남편에게 어떻게든 우물에서 벗어나라고 몰아세우지 않았어요. 우리는 다만 우물 안에서 서로를 감싸 안았습니다. 사랑을 배운 적이 없어 많이 서툴렀지만 서로의 아픔을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만은 같았습니다.    

  

  그 깊은 우물을 허물어 준 건 다름 아닌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저에게 육아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과 동시에 미처 자라지 못한 제 어린 시절을 돌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사실은 저 자신이 더 많이 성장했던 것 같아요. 아이 덕분에 저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언제나 아이와 감정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내 감정을 아이에게 휘두르는 엄마가 되지 않으려고요.      


   한 번은 동네 엄마가 길에서 저를 봤다며 왜 아들과 남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걷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날 저는 정말 아들에게 화가 나 있었고, 그 감정을 홀로 삭히느라 멀찍이 떨어져서 걷고 있었습니다. 마치 남처럼요. 저는 제 자신이 고슴도치로 변하는 게 가장 두렵습니다. 내 감정이 온몸에 가시로 돋아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찔러버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비록 냉정하게 보일지 몰라도 아들도 타인처럼 거리를 두고 존중하면서 키우고 싶습니다. 현명하지 못한 엄마라서 저는 이런 쪽을 선택했습니다.  

     

   맞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된 후 가장 두려운 한 가지는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다시 폭력을 휘두르게 돼 있다는 정의입니다. 참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문장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단호하게 폭력을 규정짓는 사회에 묻고 싶습니다. 설령 백 명의 사람 가운데 아흔여덟 명이 체득한 폭력을 다시 행사하는 사람이 된다 해도 폭력을 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두 사람이 존재한다면 이런 명확한 문장은 절대로 쓰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이건 폭력에 저항하는 두 사람의 무릎을 꺾어버리고 마는 무시무시한 프레임입니다.      


    맞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됐지만 폭력을 쓰는 사람은 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         



  

P.S 지금까지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편안하시길 기원할게요. 

    다음엔 따뜻하고 재미있는 글로 찾아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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