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또다시 4월 16일 -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나는 오랫동안 책의 첫 문장이 주는 설렘을 쫓아다녔습니다.
작가가 긴 시간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한없이 쓰고 지웠다는 반복 하다
마침내 울컥 토해 내 듯 적었을 그 뜨거운 첫 문장들...
인상적인 첫 문장을 발견하면 마치 호감 가는 이성을 만난 듯 설레었지요.
그런데 어느덧 사는 일의 의미를 곱씹을 나이가 되자
설레던 그 책의 마지막이 궁금해졌습니다.
작품마다 담겨 있던 사연과 사건들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낸 삶의 가치들...
어쩌면 작가가 독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던 말들은
책의 마지막 문장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나는 다시 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의 마지막 문장)
그날은 4월 16일이었다. 프랑스의 도청 소재지라는 것을 빼고 나면 무엇하나 내세울 게 없는 너무도 평범한 해안 도시 ‘오랑’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날 아침, 거대한 서사의 서막이 불안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 참혹함에 비해서 시작은 지극히 사소했다. 죽은 쥐 한 마리였다.
여느 날처럼 진찰실을 나서던 의사 리유는 층계참에서 그 기분 나쁜 대상을 발견하고는 발로 쓰윽 밀어 버리고 무심히 지나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득 그곳에 쥐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어 있는 쥐가 발견됐다는 것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그는 가던 길을 되짚어 상가 관리인인 미셸 노인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건물의 청결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힘을 기울이고 있던 미셸 노인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대해 불쾌함과 분노를 내비친다. 누군가가 고약한 장난을 쳤다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노라는 확언으로 그날 아침의 소동은 마무리됐다.
아니 그렇게 마무리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불행히도 같은 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리유의 눈에 그만 또다시 쥐가 보였다. 이번에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 비틀거리는 쥐를 발견한 것이다. 게다가 그 쥐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리유는 이 일이 누군가의 고약한 장난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한다. 그리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이 비단 쥐만이 아닐 거라는 것도 예감한다.
그렇게 페스트와의 길고 지난한 싸움이 시작됐다.
소설의 배경은 1940년대. 당시에는 아직 이 무서운 전염병에 대항할 치료 약조차 없었다. 유일하게 기댈 것은 혈청뿐. 하지만 이마저도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다. 만약 언제 어디서 누군가 갑작스레 기분 나쁜 열이 오르기 시작하고 수포가 온몸을 뒤덮게 된다면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내놓는 수밖에는 없었다.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이 전염병을 피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오랑이 폐쇄되고 도시가 완벽히 고립되자 이번에는 극한의 공포가 새벽안개처럼 무겁게 내려앉게 된다. 이토록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불행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리는 모두 다 그저 평균적으로 용감하고 평균적으로 비겁하며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인데, 무엇으로 이 강력한 페스트와 싸워야 하나.... 이렇게 혹독한 시기에 허무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버텨야 하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은 오로지 성실함을 무기로 지독한 페스트와 싸워나가기 시작한다.
랑베르는 침대에서 펄쩍 뛰며 일어났다. 얼굴은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관념이죠. 하나의 어설픈 관념이죠. 인간이 사랑에게서 등을 돌리는 그 순간부터 그렇죠. 그런데 바로 우리들은 더 이상 사랑할 줄 모르게 되고 만 겁니다. 단념합시다. 선생님, 사랑할 수 있기를 기다립시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영웅 놀음은 집어치우고 전반적인 해방을 기다리십시다. 나는 그 이상은 더 나가지 않겠어요.
리유는 갑자기 피로를 느낀 듯이 일어섰다.
”옳은 말씀이에요, 랑베르. 절대로 옳은 말씀이에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금 하시려는 일에서 마음을 돌려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일이 내 생각에도 정당하고 좋은 일이라 여겨지니까요. 그러나 역시 이것만은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 하고 랑베르는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이 속수무책의 혼돈 속에서도 자신의 의무를 묵묵히 다하는 의사 리유, 타지인의 시선으로 오랑의 일들을 지켜보게 된 신문기자 랑베르 그리고 말단 공무원으로 페스트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더불어 선량한 힘으로 그에 맞서는 타루. 모두가 불행한 이 시기에 오히려 세상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코타르까지. 소설 속의 인물들은 이상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독히 현실적이다. 우리 주변에도 성실함을 유일한 무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전염병이라는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났으나 좌초돼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사람 중에 내가 있다.
코로나 19라는 전무후무한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이로 인해 인생이 변곡점을 맞은 사람이 나만은 아닐 터이다. 캄캄한 암흑에 갇혀 한 발 앞으로 나가는 것도 어려운 이 시기에 나는 ‘페스트’를 다시 읽었다. 읽는 내내 ‘성실’이라는 단어가 자꾸 눈에 밟혔던 건 지금의 나에게 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나 자신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밖에는 없다. 그리고 이 긴 어둠이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라는 믿음 밖에는 다른 것은 없다.
이 책에서 한 군데 더 전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랑베르가 한 말이다.
”이제 나는 인간이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 인간이 위대한 감정을 품을 수 없다면 나는 그 인간에 대해서 흥미가 없습니다. “
그리고 또 다른 4월 16일인 2014년.
그날 오전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상하리만치 또렷하다.
그날은 아침부터 황사가 뒤덮인 날이었다. 봄날이라는 게 무색하리만치
하늘이 탁했고, 조금 쌀쌀했다. 오랜만에 시간적 여유가 생겼던 날이라 오전부터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자주 가는 찻집에서 커피와 따뜻한 크로와상을 먹으며 가볍게 공중으로 흩어지는 무게감 없는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을 때였다. 그중의 한 명이 휴대전화로 속보를 확인했고, ‘전원 구조’라는 기사의 타이틀만 보고 정말 다행이라며 서둘러 안심했었다.
그때 나눴던 ‘다행’이라는 말이 내 마음속에 앙금이 돼 버렸다. 그런 말을 나눈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나도 아이가 있는 엄마인데 아니 설령 엄마가 아니라도 그 엄청난 일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 시간들은 어떻게도 보듬을 수 없는 우리 시대의 깊은 상처가 됐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에게 2014년 4월 16일은 너무나 가슴 아픈 변곡점이 되고 말았다. 그 시간을 함께 겪은 우리는 진실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게 아닐까. 적어도 다시는 그와 같은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는 있을 것이다.
또다시 4월 16일이 다가오고 있다. 알베르 카뮈가 ‘페스트’라는 긴 서사를 맺으면서 이것이 끝이 아닐 거라고 예언한 것처럼은 위험은 우리 일상의 곳곳에 남아있다 언젠가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서 돌아올 것이다. 다만 우리는 사람이기에, 랑베르의 말처럼 때로는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다시 희망을 걸어본다. 부조리가 사라진 그 자리로 다시 진실이 되돌아오길. 나의 마음도 더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