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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고 책 May 03. 2021

으른을 위한 완벽한 해피엔딩.

4.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의 마지막 문장.

    나는 그 책을 서른넷의 봄에 읽었고, 서른일곱의 가을에도 읽었으며, 마흔두 살이 되던 여름에도 읽었습니다. 그뿐인가요 마흔다섯의 겨울에는 마치 처음 읽은 듯 책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지요. 어쩌면 쉰을 넘겨서도 예순을 맞이했을 때도 간간이 시간의 여유가 생길 때면 훌쩍 여행을 떠나듯 이 책 속으로 빠져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읽고 또 읽는 걸까요?    

  

   몇 가지의 이유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는 첫인상에 대한 미안함 때문입니다. 아마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이 저와 비슷한 분들이 있으실 거예요.  



    

   제가 막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이 작품을 영화로 먼저 만났습니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연출이었던 영화는 ‘예술과 외설의 한 끗 차이’를 보여줬다는 극찬을 받았지만 이제 겨우 미성년자를 벗어난 저에게는 주인공으로 나온 제인 마치의 앙상한 몸매와 예술보다는 외설에 가까웠던 목욕 장면만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채 잊혔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나 책으로 읽어보니 그제야 이 소설은 예술도 외설도 아닌 너무나 혹독한 성장소설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소설은 마치 사고처럼 한눈에 서로에게 반해버린 그 날의 오후를 회고하면서 시작됩니다.


 일 년 내내 한 계절만이 지속되는 무덥고 단조로운 사이공에서 가난한 열다섯 살의 백인 소녀가 부유한 중국 청년을 배 위에서 만나게 되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감추고 있지만 서로에게만은 숨겨진 상처가 보였던 걸까요?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숨죽인 비웃음 속에서도 만남을 이어나갑니다. 아버지의 반대에 저항할 힘도 없으면서 소녀를 놓지 못하는 그와 연인을 대놓고 호구 취급하는 가족들을 차마 떨쳐낼 수 없는 소녀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만나서 서로를 열렬히 끌어안습니다.      


   어찌 보면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무모하고 강렬한 욕망을 그린 작품인 것 같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삶을 끊임없이 잠식시키는 무겁고 무서운 가족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요.     

 

   소녀에게도 청년에게도 가족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이들은 있었지만, 가족의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은 없었습니다. 청년에게는 오로지 돈만 아는 아버지가, 소녀에게는 도벽에 빠진 아편쟁이 큰오빠와 그런 큰아들을 한없이 감싸고도는 엄마 그리고 자신처럼 한없이 무기력하기만 한 작은 오빠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책에서 소녀는 자신의 가족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돌로 된 가족이다. 어떤 접근도 불가능한 두꺼운 퇴적물 속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가족이다. 날마다 우리는 자살을 혹은 살인을 기도한다. 우리는 서로 말을 걸지도 않지만 보지도 않는다.’       

   날마다 자살 혹은 살인을 꿈꾸는 소녀는 이 천형 같은 시간을 버티기 위해 청년에게 기대고, 청년 또한 돈 외에는 아무것도 베풀지 않는 아버지를 잠시나마 잊기 위해 소녀에게 몸을 기댑니다. 두 사람은 삭막한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서로의 육체를 열렬히 탐닉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아무것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결국 배 위에서 만났던 두 사람은 다시 배를 통해 이별을 맞게 되죠. 


처음 그날처럼 청년은 승용차 안으로 몸을 감추고 소녀는 배의 난간에 기댄 채 청년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립니다. 이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소녀는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흘리죠. 그리고 이제 자신의 삶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됐다는 걸 아프게 깨닫습니다.    


  

  



   하지만 청년과 헤어진 후 소녀는 성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으로 아이들을 얻었고 덕분에 가족에게 받은 깊은 상처를 글로 따뜻하게 위로하는 법을 터득하지요.      


  소설 ‘연인’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일흔이 넘어서 쓴 작품입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편애가 심한 어머니와 건달 같은 큰 오빠, 사랑하는 작은 오빠와 중국계 청년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에야 뒤라스는 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어요. 그만큼 뒤라스의 열다섯 살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뒤라스는 일흔의 나이에도 두려움이 없이 이십 대의 청년과 사랑에 빠진 용감한 여성이었지요. 아마도 그녀는 그 용기가 오래전 자신을 사랑해 준 그의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생전에는 그에게 전하지 못했지만 이 소설을 통해서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의 마지막 문장은, 이 소설의 첫 문장에 이어서 전해드릴게요. 

     

  첫 문장입니다.      


어느 날, 공중 집회소의 홀에서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이미 노인이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전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당신은 젊었을 때가 더 아름다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제 생각에는 지금의 당신 모습이 그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의 당신, 그 주름진 얼굴이 젊었을 때의 당신 얼굴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연인’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흘렀다.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이었다. 그가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그녀는 목소리에서 이미 그인 줄 알았다.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예전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리는 음성 속에서, 갑자기, 그녀는 잊고 있던 중국 억양을 기억해 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아마도 나는 이 마지막 문장 때문에 이 책을 거듭해서 읽고 있나 봅니다.

어릴 적 동화책 속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완벽한 어른 버전인 이 문장. 이 문장만으로도 우울하기만 했던 나의 소녀 시절이 따뜻한 위로를 받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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