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 책의 마지막 문장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달력이 10월로 넘어가고 음력 9월이 가까워지면서 남편과의 미묘한 눈치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이 주제는 먼저 꺼내는 사람이 절대로 불리해지는 게임입니다. 서툴게 감정을 풀어나가도 안 됩니다. 그랬다간 오히려 된통 당할 수가 있습니다. 연애 5년, 결혼생활은 22년, 인생의 3분의 2를 함께 해 오며 터득한 남편의 성격상 나는 무조건 남편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도록 진득하게 기다리는 게 유리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남편의 뒤통수만 봐도 눈이 흘겨지고, 밥을 퍼도 곱게 예쁘게 퍼주는 걸 그만두고 싶어지는 이 고약한 심보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평상시 언성 높여 얘기할 일이 거의 없는 저희 부부가 이토록 민감해지는 주제는 바로 시어머님의 제사 때문입니다. 그래요, 저는 제사 증후군을 심각하게 앓고 있어요.
저희 시어머니는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하셨습니다. 제가 결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으셨는데 그런 상황으로 십 년이 넘게 투병 생활을 하셨죠. 물론 누구에게도 힘들 수밖에 없던 그 상황에서 환자였던 어머님이 가장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어려움을 타인이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겠어요.
다만 저도 며느리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타고난 그릇이 간장 종지 만한 제가 정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참고 또 참았던 시간들이었어요. 막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에 시작된 병시중이 마흔을 앞두고서야 끝났을 때, 죄송한 말이지만 미련은 없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지나서부터 시작된 병시중이었기에 시어머님과의 좋은 기억은 안타깝게도 크게 없어요. 어머님은 늘 많이 아프셨고, 많이 힘드셨고 그래서 많이....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주신 어머니에 대해서 품고 있는 남편의 애틋함에 저는 크게 공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끔은 남편의 어머니와 저의 시어머니가 전혀 다른 분인 것 같이 느껴질 때도 많았어요. 솔직히 저에겐 완전히 다른 분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매 해 돌아오는 시어머님 제사는 준비를 시작할 때부터 어머님께서 남긴 상처들을 곱씹는 시간이 돼 버리더라고요. 한 번도 속상함을 떨쳐내고 홀가분한 마음이 된다거나, 어머님이 남긴 상처들을 잊어버리고 오직 추모의 의미만 갖고 준비하게는 안 되더라고요.
만약에 어머님 생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어머님, 그렇게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저도 상처 받아요’라고 속내를 털어놓았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겠죠. 하지만 어머님은 처음부터 십여 년 동안 늘 시한부 환자셨습니다. 그냥 내가 참아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매 년 제사상을 차릴 때마다 어머님께 속상했던 일들이 다시 떠올라 제사상 차리기가 무거운 숙제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작년 10주기가 됐을 때 이제는 제사를 그만 지내고 싶다고 얘기를 꺼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편이 내년 제사에는 어머님이 좋아하시던 만두를 빚어 올리자고 하더라고요. 순간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저의 반응을 남편은 긍정으로 받아들였나 봅니다.
그래, 돌아가신 어머님을 위해서 제사상을 차리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남편을 위해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는 거지. 남편과 이혼할 생각이 아닌 다음에야 그냥 내가 참아내는 게 낫지 않을까... 지난 1년 동안 이런 생각들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제사 증후군이 치료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올해도 어김없이 도지고 말았네요.
올해는 반드시 해결하고 말리라! 다짐하면서 읽은 책이 바로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입니다. 앞서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고는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도무지 발전이라는 게 없는 이기적인 남자 지구인보다는 사랑에 있어서 이미 완성형인 외계인을 만나는 게 요즘 말로 ‘개이득’이라는 점에 저는 통쾌하게 웃었습니다. 정말 단박에 정세랑 작가를 좋아하게 됐어요.
그런 작가가 그려낸 제사 문화에 또 한 번 반했습니다.
심시선이라는 뿌리에서 뻗어 나온 네 명의 자매와 그의 배우자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심시선 여사의 10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멀리 하와이로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각자 제사상에 올릴 특색 있는 무언가를 찾아서 정성껏 제사상을 차리는 모습은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현실에서도 꼭 있었으면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심시선 여사를 위해 차려진 제사상 부분을 발췌하겠습니다.
“상의 왼쪽 구석에는 명준이 호놀룰루 미술관의 분관인 언덕 위의 스팔딩 하우스에서 만들어온 블록 탑이 놓였다. 해양 쓰레기로 만든 재생 플라스틱 블록이어서 색깔이 바랜 듯 흐릿했다. 언뜻 보기에는 촛대처럼도 보였는데 일단 명준의 의도는 탑이었다고 했다....
명은은 뒷줄 가운데에 잘 말려서 두꺼운 종이에 붙인 레후아 꽃과 등산화 밑창에 끼여 있던 작은 화산석 자갈을 올렸다....
가운뎃줄엔 난정이 박물관에서 만들어온 레이 목걸이와 서점에서 사 온 하와이 배경 소설이 한 권 놓였다....
맨 앞줄에는 상헌이 사 온 과일들이 왼쪽에, 경아의 커피가 가장 좋은 가운데에, 규림이 올려둔 종이 증서가 오른쪽에 놓였다... ”
심시선 여사를 위한 제사상에는 자손들이 각자 그녀를 추모하는 사연들이 차려졌습니다. 심시선이라는 여성이 힘든 시기에 얼마나 열정적으로 삶을 개척해 냈는지를 자손들은 떠올리고, 되새기는 시간을 갖게 되죠. 그렇게 자신을 지탱해주는 뿌리의 깊이를 헤아리며 앞으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시선으로부터’의 마지막 문장이에요.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저에게도 아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아들에게 이런 당부를 남기고 싶어요.
“일 년에 한 끼, 엄마가 너에게 사준다 생각하고 평상시에 쉽게 먹을 수 없는 엄청 비싸고 귀한 음식을 편히 사 먹도록 해. 먹으면서 엄마 생각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맘껏 맛있게 먹으렴.”
이런 제사가 될 수 있도록 저는 올해 남편과의 눈치 싸움에서 이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 해보겠지만 만약 못 이긴다면.... 그렇다 해도 포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내년에도 제사는 어김없이 돌아올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