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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새해 May 09. 2020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원하 시집

온라인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이원하 시집을 삭제하고 당장 책방으로 갔다. 하루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한겨레 21에 소개 된 그의 첫 시집 소식을 읽은 뒤였다. 그는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제 서른을 갓 넘긴 젊은 시인이다. 미용고를 졸업하고 언제나 일을 했다는 시인의 이력, 짝사랑하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알쏭달쏭하게 썼더니 시처럼 보였다는 시인의 너스레, 등단을 위해 제주로 내려가 바리스타로 일하며 글을 쓴 지 6개월 만에 목적을 이루었다는 괴력(?), 제목과 달리 술을 잘 마신다는 시인의 폭로, 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한 웃는 사진, 모두 매력적이었지만 나를 당장 책방으로 달려 가게 한 것은 기사의 이 부분 때문이었다.

(시인은) 해설을 받기 전 신(형철) 평론가에게 해설을 잘 써달라고 부탁하려고 엽서를 썼다. 동쪽 오도리에 살았지만 서쪽 모슬포라면 소인이 예쁠 것 같았다. 찾아갔더니 우체국에서는 ‘소인은 이제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제 것은 찍어주셔야 합니다”라고 주장해 겨우 찍었다.    -이원하 시인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한겨레 21, 구둘래 기자 , 2020,04.24)  중 -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원하
 문학동네


시집을 열면 시인의 말이 나온다

편지 아닌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그 편지의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해요.

저 아직도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그리고 차례가 나온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014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016/약속된 꽃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묻는 말들 018/나는 바다가 채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020 /풀밭에 서면 마치 내게 밑줄이 그어진 것 같죠 022/첫 눈물 흘렸던 날부터 눈으로 생각해요 024/참고 있느라 물도 들지 못하고 웃고만 있다 026/싹부터 시작한 집이어야 살다가 멍도 들겠지요 028/섬은 우산도 없이 내리는 별을 맞고 030/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다녀왔다 032...


제목만로도 시가 되는.


ⓒ새해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부분)

유월의 제주/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중략)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표정은 빛이겠다 (부분)

너에게 불쑥, 하나의 세상이 튀어나왔을 때/ 나에게는 하나의 세상이 움푹, 꺼져버렸어//그날부터 웃기만 했어 /잘 살펴보지 않으면 속을 알 수 없지/ 원래 어둠 속에 있는 건 잘 보이질 않지//빛을 비추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서/웃기만 했어//얼마나 오래 이럴 수 있을까/정말 웃기만 했어//처음으로 검은 물을 마셨을 때/빈자리의 결핍을 보았어/결핍에게 슬쩍 전화를 걸었는데 받았어,/받았어/ 결핍이 맞았던 거지  


오랜만에 시집을 샀다. 정확히 말하면( 시집이야  계속 샀지만) 새로운 시인의 시집이 오랜만이란 얘기다. 심보선 시집, 김경주 시집 이후  10년은 된 것 같다.  한참 동안  새로운 시를 읽지 않았다.  어쩐지 시가 심드렁해졌다. 아니다, 시가 심드렁해진 게 아니라 나의 삶이 총체적으로 심드렁해졌다.

 

이원하의 시는 나의 잠자던 시 읽기 세포를 깨워주기에 충분했다. 그의 시는 밝고 명랑한 어조와 통통 튀는 리듬감, 천진하고 거침없는 상상을 발휘하지만  마냥 즐거운 시는 아니고 웃음과 울음이 교차하는 시다. 웃다가 아프다가  다시  어여쁜 생각으로 글썽글썽 웃게 하는 시.

나비라서 다행이에요 (전문)

내 할아버지가 맞나/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니/광대 근처에, 낯선 구멍 하나// 어쩌다 눈이 세 개가 되셨냐고 물으니 /내가 보고 싶어 그러셨단다// 아프지 않으셨냐고 물으니/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정도라며 웃으신다//내가 눈으로도 마음으로도/억장이 무너지는 듯해/침만 삼키고 있으니//까닭을 알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원하의 첫 시집을  '자연에서 자유까지- 웃는 사람 이원하'라고  했다. 또래 시인들에게서 흔치 않은 자연과의 친분은 왜 있고, 시인에게 자연은 어떤 의미인지, 시집 이후 시인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시의 길을 차근하게 읽어준다. 신형철 평론가는 글을 잘 읽어 줄 뿐 아니라 잘 쓰는 사람이다. 간혹 그가 읽어 주는 시가 본래의 시보다 더 매혹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그는 또한 비판하지 않는 평론으로 유명하다. 아닌게 아니라  지나친 상찬이 가끔 불편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글을 믿고 읽게 되는 것은  대상에 푹 잠겨 조심조심 건네는 마음의 글임을 백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원하의 웃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를 향해 있다. 그는 제 결핍을 웃는다. 이 웃음은 시소의 한쪽 끝에 올라탄 웃음이기때문에 반대쪽 끝에는 꼭 그만큼의 울음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감정의 균형잡기는 이원하 시의 중요한 본질이다.  - 이원하  시  해설 /신형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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