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로자 Mar 26. 2022

리뷰: Destroyer – LABYRINTHITIS

#18. 감각해보지 못한 시절에 노스탤지어를 선사하기

  종종 그럴 때가 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낯선 것에 대한 향수를 감각하는 순간, 그렇게 이유 모를 눈물을 뚝뚝 흘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이런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좋은 시네마의 책무라고 지금까지 줄곧 믿어 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건 굳이 영화예술만이 도달해낼 수 있는 감정의 경지는 아니다. 캐나다 밴쿠버의 고독한 싱어송라이터 댄 베허가 이끄는 인디 록 프로젝트 디스트로이어의 신보, “LABYRINTHITIS”를 들으며 느낀 감정이야말로 정확히 이러한 유형의 것이었다.


  이제는 거장 반열에 오른 디스트로이어가 20년이 넘는 커리어와 디스코그라피를 통틀어 일관되게 유지해 온 것이 하나 있다. 이는 바로 80년대 영국 소피스티-팝의 정취를 간직한 잔잔하고 사색적인 분위기였다. 폴 웰러의 스타일 카운실이나 샤데이, 혹은 록시 뮤직 출신의 브라이언 페리가 선보이던 소피스티-팝은, 뉴 웨이브 유행의 사운드적 다양성 위에 솔 음악과 이지 리스닝 재즈의 편안함과 도회적인 분위기 그리고 성찰적인 가사를 입혀 특유의 세련된 감각을 빚어 냈다. 남한 청자들에게는 낯선 장르 이름이겠지만, 빛과 소금이나 어떤날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친숙하게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 뉴 웨이브 유행과 흥망성쇠를 같이 한 소피스티-팝 유행은 비록 80년대 이후로 힘을 쓰지 못했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며 밴쿠버 인디 씬을 뚫고 나온 디스트로이어가 10년 전 쯤 “Kaputt”(2011, Merge / Dead Oceans)을 통해 선보인 완벽히 절제된 사운드는 소피스티-팝의 댄디즘적 분위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오늘날의 음악시장에 훌륭히, 그리고 한층 진보된 형태로 소환해 내었다.


  이후에도 준수한 집중력을 유지하며 앨범들을 발매해 온 디스트로이어지만, “LABYRINTHITIS”의 사운드는 예상 외로 특별하다. 첫 트랙 ‘It’s in Your Heart Now’를 재생하자마자 흘러 나오는 것은, 현악 텍스처 따위를 심혈을 기울여 겹겹이 쌓아낸 환상적 서정의 앰비언트 레이어, 그 위에서 중심을 잡는 초기 뉴 오더 풍의 베이스 사운드 그리고 이다지도 덤덤히 풀어내는 댄 베허의 보컬이다. 철저한 완급 조절과 빌드-업 속에서 질투심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사운드 메이킹이 대양처럼 펼쳐진다. 다음 트랙 ‘Suffer’에서부터는 초기에서 중기로 이행하는 뉴 오더처럼 신디사이저와 드럼 머신의 사운드를 서서히 차용해 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밴드 사운드와의 놀라운 조화를 이뤄내고, 벤 마허는 그 사이에서 덤덤하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끌고 가는 ‘중용의 미’를 발휘한다. 세 번째 트랙 ‘June’에서는 그러한 경향을 좀 더 팝적으로 풀어가다가도, 잔향을 멋지게 입힌 관악기와 기타 사운드를 적재적소에 끼워 넣으며 동시대의 사이키델릭한 인디 록 트랙들을 연상케 하는 놀라운 매력을 선사한다.

 

  다섯 번째 트랙 ‘Tintoretto, It’s for You’는 앨범에서 가장 먼저 공개된 싱글이기도 하다. 피아노의 재즈적 카코포니(불협화음)를 환상적으로 활용하며 텅 빈 공간에 색을 입혀 가다 이리저리 튀는 신스와 베이스 사운드로 구조를 별안간 역동적으로 흔들기 시작하고, 흥분을 재즈 브라스로 마무리 짓는 흥미로운 트랙이다. 앰비언트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잠깐의 브릿지 ‘Labyrinthitis’에 뒤따라오는 일곱 번째 트랙 ‘Eat the Wine, Drink the Bread’ 역시 싱글 컷이 된 곡인데, 디스트로이어 특유의 뉴 웨이브 사운드, 그리고 나일 로저스를 연상케 하는 톡톡 튀는 기타와 그루브가 인상적인 베이스로 끌고 가는 훵크 사운드가 경합을 벌이며 댄서블한 흡입력을 만들어 낸다. “LABYRINTHITIS”의 싱글들은 저마다의 어마무시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차곡차곡 전개되는 앨범의 흐름을 무너트리지 않는다.


  앨범을 들으며 쉽사리 간과할 수 있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LABYRINTHITIS”가 간직한 80년대 초 포스트 펑크 장르음악의 바이브다. “LABYRINTHITIS”의 여러 순간들은 뉴 오더가 본격적인 전자 음악을 시작하기 이전 내놓았던 초기작들, 가령 그들의 데뷔 앨범 “Movement”(1981, Factory) 혹은 2집 “Power, Corruption & Lies”(1983, Factory) 속 몇몇 트랙들의 매력들을 놀라울 정도로 멋지게 재현한다. “LABYRINTHITIS”의 첫 트랙 ‘It’s in Your Heart Now’, 아니면 ‘All My Pretty Dresses’나 ‘It Takes a Thief’ 같은 트랙들이 특히나 그렇다. 조이 디비전의 위대한 프론트맨 이안 커티스가 신경증 앞에 무너져 죽음 속으로 사라진 후, 남겨진 멤버들이 다시 꾸린 뉴 오더는 조이 디비전 시절의 자기파괴적 색채를 걷어 냈지만 구름 한 점 없이 밝지만은 않은, 서늘하고 흐린 파스텔 톤의 중간지대에서 자기만의 ‘지속 가능한’ 서정을 찾아 냈다. “LABYRINTHITIS”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칠해가는 색깔도 이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런던에서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원류 포스트 펑크 씬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좋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여럿 등장했다. 셰임이나 드라이 클리닝 같은 신진 밴드들을 예시로 꼽을 수 있을 테다. 근래에 그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하지만 “LABYRINTHITIS”를 듣고 나니, 이것이 선사하는 감정과 장르음악적 감각은 그들보다 한 차원 높은 층위에서 포착된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댄 베허는 드라이 클리닝처럼 약간은 신경증적인 어투로 낱말들을 내뱉고 포스트 펑크 장르 특유의 미니멀한 베이스 리프가 가진 매력을 멋지게 배치해 내며, 블랙 컨트리, 뉴 로드처럼 다양한 악기들을 동원한 매력적인 빌드-업도 활용해낼 줄 안다. 하지만 여러 문법을 경유해 앨범으로서 완성된 “LABYRINTHITIS”에서 느껴지는 것은 ‘천착’이 아닌 아름다운 ‘조화’다. “LABYRINTHITIS”는 초기 뉴 오더에 대한 향수를 오늘의 인디 세대에 맞게 적절히 재구성하여 선사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나지는 않는, 어쩌면 “Kaputt”의 감동을 뛰어넘는 디스트로이어 최고의 앨범이다.



“LABYRINTHITIS”, Destroyer


2022년 3월 25일 발매
정규 앨범
장르: 인디 , 아트 , 신스 ,  웨이브, 얼터너티브 , 소피스티-, 포스트 펑크
레이블: Merge, Bella Union
평점: 9.0/10 (필청!)
매거진의 이전글 리뷰: Charli XCX – CRASH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