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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자 Apr 03. 2022

리뷰: 회기동 단편선 – 처녀

#20. 가장 주술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

*일러두기: 최근에는 프로덕션 ‘오소리웍스’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 단편선 씨는, 지난 4월 1일 ‘회기동 단편선’이라는 이름의 솔로 포크 프로젝트로 활동하던 시절 발매되었던 정규 1집 앨범 “백년”(2012, 자립음악생산조합 / 인디혁명당 / 오소리웍스)과 EP “처녀”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회기동 단편선’의 첫 정규 앨범 “백년”의 발매 10주년이기도 한데, 마침 이를 맞아 “백년”은 새롭게 LP로 제작된다고 합니다. 이를 기념하여, 이제는 우리 인디 씬의 사료가 된 앨범과 EP를 다시 들어봅니다.



  회기동 단편선의 디스코그라피에 대해 이야기할 , 어쩌면 나는 일말의 객관성조차 지킬  없을  모른다. 이명박이 광화문 한복판에 컨테이너로 산성을 쌓고 물대포와 경찰봉으로 시민사회를 찍어 누르던 2011, 나는  중학교에 입학한 치기 어린 반골  키드였고, 학교 도서관 구석에서 너바나가 흘러 나오던 헤드폰을 꽂고 『마르크스 평전』을 읽던 나에게 박정근의 레이블 ‘비싼트로피 이를 둘러싼 게릴라 뮤지션들의 도발적인 커리어는 신화적 서사로 다가왔던 것이겠지. 마침  시기 이들과 어울리던 그라인드코어 밴드 밤섬해적단은 그들의 가사 그리고 트위터에 툭툭 던지던 “주체사상은 단백질이 풍부하다같은 농담들로 국가보안법 재판까지 치르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 10 뒤의 내가 그들이 했던 운동의 막차에 올라타 몰락을 같이 경험하고,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같지 않습니까라는 김승옥의 구절을 삶에 찌든 사람처럼 읊조리는 필부가 되어 있을지.


  하지만 이러한 서사 없이도 회기동 단편선의 음악은 이미 어떤 ‘영성’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쩌면 70년대 남한 포크 청중들이 한대수를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 2010년대 인디 씬의 청중들이 회기동 단편선을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이 비슷한 맥락 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심연을 토해내는 탐 웨이츠처럼, 때로는 낱말들을 덤덤히 겨우겨우 내뱉으며 진술하는 사람처럼 노래하는 한대수는 충격적인 데뷔 앨범 “멀고 먼 길”(1974, 신세계 레코드)에서 어쿠스틱 기타 한 대만으로 감정을 예민하게 진동하고 공명하는 형태로 벼려내며 청취의 경험을 한 시간의 명상으로 만들어 냈다. 회기동 단편선의 정규 앨범 “백년”이 얼터너티브와 아방가르드 그리고 여러 노이즈의 실험법들을 포크와 접합하는 데에 집중한 야심찬 앨범이었다면, EP “처녀”는 한 편으로는 낮은 해상도와 앙상한 편곡의 미니멀리즘적 토대 위에서 마치 한대수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 더 본질적인 감정에, 요컨대 ‘토해내기’에 집중하며 어떠한 경지에 도달했다.


  “백년”은 다섯 곡의 수록곡으로 이루어진 30여 분 남짓의 EP다. 감정들이 강렬하게 요동치는 30분은 숨 쉴 틈 없이 몰아치고 한 편으로는 청자의 혼을 쏙 빼놓는다. 20분 분량의 앨범들도 ‘정규 앨범’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시대에, 이 EP를 사실상의 정규 앨범으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있다. 한 편으로 “백년”이 간직한 특유의 주술적인 분위기는 EP 발매 직후 결성된 밴드 단편선과 선원들의 사운드, 요컨대 퍼커션과 바이올린을 동원해 빚어내는,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의 교차’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한 오묘한 사이키델릭 포크 사운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단적으로 “처녀”의 수록곡 중 세 곡, ‘공’과 ‘노란방’ 그리고 ‘언덕’은 단편선과 선원들의 데뷔 앨범 “동물”(2014, Pison Contents)에 재녹음되어 수록되기도 했다.


  드랙을 한 단편선이 렌즈 너머를 응시하는 인상적인 앨범 커버의 EP에서, 그는 가사의 ‘시학’ 그리고 사운드적 측면 양면에서 경계 위를 줄타기하는 추상을 강렬하게 밀어 붙인다. 이는 섹슈얼리티적인 것일 수도, 그 밖에 뭐라 명명하기 쉽지 않은 인상들일 수도 있다. 광야에서 말을 달리는 서부극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기타 리프로 EP의 문을 여는 ‘공’은 ‘커짐’과 ‘작아짐’, ‘뜨거워짐’과 ‘차가워짐’과 같은 원초적 감각 사이를 맴돈다. 두 번째 트랙 ‘노란방’은 사실 조악하다고 해야 할 EP의 프로듀싱 사이에서 인상적으로 두드러지며 뻗쳐 나가는 절묘한 멜로디와 퍼커션 라인을 뱉어낸다. 여기에서부터 서서히 신경증적으로 전화하는 단편선의 보컬은, ‘언덕’에서 국악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어쿠스틱 기타 한 대에 의존하며 더욱 더 날카롭게 날을 세워 간다.


  네 번째 트랙 ‘전통’은 구조의 미학을 자랑하는 대곡이다. 단편선이 “백년”에서 선보였던 아방가르드적 면모와 이후 주요한 문법이 되는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의 교차’라는 명제가 경합을 벌이다 뒤섞인다. 먼 곳에서 메아리 치는 단편선의 보컬과 빙글뱅글 맴도는 기타 리프가 차곡차곡 쌓여가다, 어느 시점에서는 포스트 록의 방법론처럼 겹쳐지고 폭발한다. 뒤이어 EP를 마무리짓는 ‘이쪽에서 저쪽으로’는, “백년”과 “동물”의 수록곡 ‘소독차’처럼 완급을 조절하며 온정적인 분위기로 우리를 감싸 안는 포크 트랙이다.


  이번 스트리밍 발매에 부쳐, 단편선은 “처녀”가 언더그라운드 음악 페어 “레코드폐허”에 출품하기 위해 급하게 작업해 낸 농담 같은 괴작이었다는 소회를 밝혔다. 물론 급하게 작업되고 완성된 EP는 의도치 않은 것이 분명한 지저분한 노이즈들과 정돈되지 않은 날 것의 사운드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무질서 속에서야말로, 우리는 사이키델리아의 이념형에 맞닿은 어떤 황홀에 맞닿을 수 있다. 어쩌면 “처녀”는 조증과 우울이 뒤섞인 혼재삽화처럼 다가올 수 있는 앨범이지만, 단편선이 온갖 추상과 은유를 경유해 내뱉는 주술적 언어들은 결국 자기진술이 되어, 그렇게 정치성마저 획득해 간다.



“처녀”, 회기동 단편선


2013년 6월 28일 발매 (2022년 4월 1일 스트리밍 발매)
익스텐디드 플레이 (EP)
장르: 인디 포크, 사이키델릭 포크, 아방트-포크
레이블: 오소리웍스
평점: 9.3/10 (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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