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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자 Jan 02. 2023

부활 2집을 듣다가 괜히 빡이 쳐서…


  부활 2집을 참 좋아했더랬다. 어쩌다보니 어릴 때부터 1집과 2집을 갖고 있었는데, 부활이 막 데뷔했을 때 외삼촌이 사 두어서 건전가요까지 실려 있는 초판 바이닐과, 나중에 YBM 서울음반(지금은 로엔을 거쳐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된)에서 2003년에 ‘슬리브 CD’라는 근본이 있는 듯 없는 듯한 네이밍으로 낸 LP 미니어처 컨셉의 CD들이다. 성남 반지하에서 살던 시절, 초등학교 고학년때부터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내 CD장의 수납공간을 물리적으로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던 건 레드 제플린, 산울림, 비틀즈 그리고 밥 딜런의 디스코그라피 속 앨범들이었는데(특히 산울림이랑 비틀즈는 정규 앨범들을 다 가지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저것들보다도 더, 음반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많이 들었던 건 부활의 첫 정규앨범 두 장이었다. 농담 삼아 “어렸을 때 부활 2집을 너무 많이 들었더니 음울한 사람이 되어서 20대에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라 할 수 있을 정도로… ㅋㅋㅋ. 물론 저는 알고보니 우울증 환자가 아니었고, 그것보다 더 문제적인 양극성 장애 환자입니다.

 

  부활의 데뷔앨범은 보석 같은 트랙들을 담고 있었지만, 앨범 단위의 완성도를 생각한다면 다소 아쉬운 지점들을 갖고 있다. 서울음반이 레코딩 세션에서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는 이런저런 트집을 너무 많이 잡아서, 마케팅 측면에서 형식적으로는 메탈헤드들에게 어필하는 식으로 접근했지만…

 

(예컨대 앨범 뒷표지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라우드니스를 깨트릴 유일한 그룹이다. 똑같은 장비 및 시스템을 갖고 라우드니스와 실력을 겨룬다면 부활이 한 수 위의 그룹임을 언젠가는 증명하게 될 것이다. 이미 일본의 라우드니스 팬클럽 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라우드니스를 지옥에 보낼 것이라고…”라는 ‘경복고교 3학년 이호석 군’의 낯 부끄럽고 쇼비니즘적인 멘트가 적혀 있었고, ‘인형의 부활’ 같은 트랙에서는 김태원 씨가 [실상은 박자를 주구장창 씹어먹었고, 또 곡 자체의 bpm이 빠른 것과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숫자의 노트를 연주하냐는 것은 또다른 문제지만] ‘bpm 210에 맞춰 속주를 한다’며 무슨 코리안 잉베이 맘스틴 같은 이미지로 홍보를 했으니까… 아, 이 앨범의 제목부터가 “Rock Will Never Die”였다.)

 

  막상 앨범을 까보니, 라디오를 타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한, 블루스 프레이즈에서 오는 서정성을 적극적으로 차용해 오는 미드 템포의 AOR(adult-oriented rock)적 어프로치들이 메탈헤드들에게 어필하려는 시도들과 모순되게 충돌하며, 다소 산만하고 난잡하며 해리된 결과물들이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데뷔 앨범을 통한 부활의 첫 여정은 장르음악적 표류를 거쳐 갔던 셈.

 

  1집의 사운드적 지향과 단절되지는 않되, 이 시기에 가졌던 과도기적 한계와 고민들에 답을 내놓으며 일련의 완결성을 구축해낸 것이 부활의 소포모어 앨범 “Remember”였다. 이러한 지향은 ‘장르음악적인 요소들을 어떻게 총체성 있게 구축해낼 것인가’라는 것을 기저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고민을 멋지게 해결해 낸 앨범은 결과적으로 장르음악적 공간으로서 남한 메탈 씬의 판도도 뒤흔들 수 있었다. 70년대에 유년기를 보내고 80년대에 어찌저찌 가난한 뮤지션으로 성장한 김태원 씨 자신의 생애사를, 관계성을 어떻게 수행해 왔는가에 대한 성찰을 중심으로 따라가는 주제의식은, 특히 바이닐 앞면의 회상 3연곡을 위시한 컨셉트 앨범의 형식을 통해 탄탄한 서사로 구축된다. 그 속에서 앨범이 간직한 특유의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는 치열한 일관성을 갖춘 채 유지된다. 여기에 미학적 설득력을 부여하는 건 네오 클래시컬 메탈의 절륜하고 화려한 연주들 속 스케일을 차용해 오며 얻어낸 비장미, 그리고 트랙 당 10분이 넘어가는 대곡 지향성 속 차곡차곡 쌓아가는 복잡다단한 구조의 미학이다. 요컨대 부활 2집은 당대(80년대 말) 최고의 프로그레시브 메탈 앨범이었다. 남한 메탈 씬에 국한짓지 않아도 여전히 그렇다. 올드스쿨 헤비메탈 사운드를 매개로 서사적 구성을 어떻게 그려 가는지에 관한 청사진을 선보인 퀸즈라이크의 앨범 “Operation: Mindcrime”, 그리고 8분이 넘어가는 장황한 러닝타임의 대곡들 속에서 절묘하게 리프들을 쌓아간, 메탈리카 디스코그라피 속에서 가장 프로그레시브적인 실험이었던 4집 “…And Justice for All”은 둘 다 부활 2집이 세상의 빛을 본지 1년 뒤인 1988년에 발매되었다. 다른 메탈 장르음악의 하위 요소가 아니라 독립적인 ‘장’의 형태로 프로그레시브 메탈이라는 음악의 성격을 정립해 낸 드림 시어터와 툴이 메인스트림에서 활약한 것은 한참 뒤다.

 

  그런데 갑자기 부활 2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꽤나 불쾌한 이유 때문이다. 유희열 씨가 그 정의도 모호한 ‘표절’ 논란에 휩싸이며, ‘게으르게 남의 창작물을 도둑질하는 표절 창작자’라는 상에 대한 안티테제로 김태원 씨가 자주 호명되고, ‘치열하게 스스로를 고통 속에 내몰며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롭게 쥐어 짜내는 창작자의 창발성’이라는 허위의식을 대표하는 것을 김태원 씨 스스로도 즐기는 것 같아 요새 참 실망스러운데, 부활의 음악이, 특히 2집이 어떤 경로를 거쳐 만들어졌는가를 생각하면 이는 너무나도 자기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담론을, 그 세대에서 가장 성찰 없는 비평을 생산해내다 하나의 역한 헤게모니가 되어버린 임진모 씨와 같이 끌고 가고 있다는 지점에서 더 열이 받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창작물을 정량적으로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은 도저히 가능하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원작자가 문제제기를 하고 창작자가 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표절’이라는 수사를 둘러싼 모든 문제들은 철저하게 주관성 위에 서 있다. 많은 청취자들이 “이 음악은 저 음악이랑 똑같은데?”라는 인상을 받았다 치더라도, 말 그대로 취향 진술로 환원되는 ‘인상’을 어떤 객관적 근거를 대가면서 증명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 애초에 해적질, 전유, 콜라주, 오마주, 레퍼런스 따위의 개념들을 명확하게 경계 짓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한 편으로 이러한 경계짓기는, 창작물을 물화하고 여기에 교환가치를 부여하여, 사유재산으로서 창작물이 갖는 가치와 이윤 창출의 시장구조를 수호하기 위한 자본의 욕망으로부터 기인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전제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부터가 음악산업 속 생산자와 소비자가 기피해야 하는 최악의 태도지만, 더 황당한 것은 과거의 김태원 씨와 부활이 ‘음악산업이라는 장, 여러 다채로운 장르음악들의 문법들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고립된 공간 속에서, 아무런 교류 없이 자기만의 음악을 하는 창작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부활의 1집과 2집, 특히 2집은 오히려 적극적인 ‘레퍼런스’들을 동원해내는 것, 음악사의 유산들을 삼키고 소화하여 멋지게 뱉어내는 것에 능한 결과물이었으니까. “Remember”는 앞서 말한 것처럼 네오 클래시컬 메탈 그리고 프로그레시브 메탈의 양식과 문법을 지켜보고 적극적으로 호흡하며 만들어진 앨범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김태원 씨는 기존에 존재하던 음악들을 작곡 속에 적절히 배치하고 이를 ‘레퍼런스’로 홍보했다. 가령 2집 바이닐 B-사이드의 대곡 ‘천국에서’의 후렴 보컬 코러스 라인은 모짜르트의 레퀴엠 중 라크리모사를 삽입한 것이다. ‘천국에서’라는 곡이 갖는 죽음과 사후세계에서의 재회라는 주제는 레퀴엠이 갖는 장송곡이라는 성격에서 모티브를 빌려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앨범의 마지막 트랙 ‘Jill’s Theme’은 시네필이자 엔리오 모리코네의 광팬으로 잘 알려진 김태원 씨가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의 사운드트랙을 커버한 것이다. 이러한 트리비아들은 서울음반에서 부활 2집을 홍보하는 문구로 적극적으로 쓰였다.

 

  음악사를 탐닉하며 쌓아 온 취향을 활용하고 재배치하는 방법론을 ‘자랑스레’ 수행해 온 김태원 씨가, 이제 와서 ‘독창적인 악기 연주자는 컴퓨터로 샘플들을 짜집기해 음악을 만드는 도둑들보다 위대하다’는 허위의식을 재생산하는 데에 일조하는 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저도 둘 다 해봤는데 별로 다를 것 없디다. 김태원 씨가 디스코그라피의 절반 이상을 원작자들의 표절 시비로 걸려서 소송을 돈으로 무마한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의 추종자라는 사실에는 웃음도 안 나온다. 이런 ‘선배’들 때문에 무기력해져서 음악을 관두고 싶어지는 거다.


  아, 마지막으로. 미디어의 '천재 찾기'라는, 창작자에 대한 뒤틀린 낭만화도 사라져야만 하겠습니다.


이 댓글 때문에 열 뻗쳐서 급발진을 좀 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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