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적 유물론을 근대적 플라톤주의로 이해하기
이 글은 전혀 새로운 논지를 담고 있지 않다. 오랫동안 여러 급진적인 비평가들은 맑스를 넘어서 맑스-레닌주의를 소비에트 해체 이후의 20세기 후반부 혹은 21세기의 생활세계에 소환해오고자 했다. 프랑스의 공산주의자 알랭 바디우가 그랬고, ‘MTV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역시 특유의 도발적인 언어로 철학자 레닌을 현재로 불러 왔다. 나는 그 중에서도 실험 사회주의 체제 소련과 동독을 경험한 바 있던 독일의 미학자 보리스 그로이스의 입장에 의존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나는 『국가와 혁명』을 위시한 여러 정치 문건을 통해 드러나는 레닌과 스탈린의 볼셰비키 국가론이 갖는 근대적-플라톤적 국가론으로서의 성격을 소개할 것이다. 이 관념적 여정 속에 우리는 ‘철학자들의 왕국’인 사회주의 국가에 도착한다.
우선 공산주의자들은 유물론자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보기에 맑스와 플라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벼랑 같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물질인가? 분명 공산주의는 경험되었다. 공산주의는 150년 전의 파리 코뮌이라는 계기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과 실험사회주의 체제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계기로 경험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경험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유물론자들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이분법적 경계, 경험론과 지성론의 이분법적 경계로 구분될 수 없다. 가령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에서, “‘정신과 자연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와 같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근세 철학의 무의미한 논제 때문에 철학의 근본 문제는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이분법으로 분리되고 존재론과 인식론을 혼동하게 된다”는 설명을 한다. 이전까지의 유물론자들은 인간이 지각하고 인식하는 대상이 인간의 외부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경험론자들의 인식론은 감각지각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철학의 플라톤적 경향 반대에 선 이들은 비-정신적이며 양화적인 지점에서만 성립 가능하다.
그런데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토대 위에 선 공산주의자들은 근대의 플라톤주의자들이다. 이는 두 가지 층위에서 그러하다. 하나는 맑스의 유물론에서 다루는 ‘물질’이 포이어바흐를 위시한 기계적 유물론자들의 ‘물질’처럼 ‘그저 가만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맑스의 유물론은, 사람들이 물건을 필요로 하고,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필요한 물건을 만들거나 얻기 위해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이 관계들이 충돌하는 모든 과정들을 들여다보는 유물론이다. 헤겔의 관념도 생동성을 가지고 운동하고, 맑스의 관념도 생동성을 가지고 운동한다. 헤겔에게 시민사회가 절대정신의 반영이라면, 맑스에게 관념과 사회와 문화는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만들어지고, 모순이 벌어지면 뒤바뀌기도 하는 ‘이데올로기’다. 종전의 유물론자들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파악하지만 ‘문화세계’로서의 사회가 어떠한 메커니즘을 통해 구성되고 작동하는지, 또 이것의 서사인 역사가 어떻게 진보하는지, 그리고 관념은 어떻게 생산되고 실재의 변화와 재생산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맑스의 역사적, 변증법적 유물론을 경유할 때 가능해진다. 이것은 맑스가 유물론적 관점을 수용하되, 포이어바흐가 그랬던 것처럼 독일 관념론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활용하기 때문이다. 고대 헬라스에서 플라톤이 끝없는 변증술(dialektike)의 반복을 통해 이성의 존재에 도달한다면, 독일 관념론자들은 변증법(dialectic)의 반복을 통해 실천이성의 종착점으로서 포착되는 절대정신에,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적 존재’에 도달한다. 이것들은 공통적으로 비-물질적이고, 비-계량적이다. 이것들은 공통적으로 객관적이며 보편적이다. 이것들은 공통적으로 ‘의식’적이다. 공산주의가 비록 감각지각으로 포착될 수 없더라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적으로 의식된다.
다른 한 편으로 공산주의자들은 국가론적 측면에서 플라톤적이다. 가령 『코뮤니스트 후기』에서 보리스 그로이스는 볼셰비키 국가론을 플라톤 철학과 비교하는 작업을 한다. 핵심은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경제적 결정이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경제적 결정을 매개하는 것은 자본이다. 가령 최근에는 급진민주주의, 신사회운동, 정체성 정치와 같은 담론들이 개인의 삶에 해방적 전망을 가져오리라는 기대가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담론들이 사회주의로의 이행 없이 유통되는 것은 해방적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 모든 정치경제적 결정이 자본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저항 담론도 마찬가지의 경로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담론들은 물화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소비된다. 지젝은 「진실을 위한 권리」에서 인도 맥도날드의 예시를 든다. 소고기를 먹지 않는 힌두교도들은 감자칩을 튀길 때 소 기름을 사용하는 맥도날드에 맞서 불매 운동과 집회를 벌였다. 그런데 맥도날드는 이러한 ‘소비자 운동’의 요구를 반영해 소 기름을 식물성 기름으로 바꾸었고, 맥도날드에 대한 저항은 맥도날드에 대한 소비로 수렴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와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예쁘고 매력적인, ‘상품으로서의 교환 가치를 가진’ ‘굿즈’를 후원자들에게 증정하는 운동 단체들에 후원한다. 그때그때 등장하는 의제들은 대중의 이목을 끌고자 ‘상품으로서의 교환 가치를 가진’ 매력적인 이미지와 구호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고 담론의 장이라는 시장에서 경쟁한다. 교환 가치가 없는 담론은 그것이 아무리 급진적이거나 시의적절한가에 상관 없이 시장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이 수요는 이데올로기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운동은 광고, 미디어, 이미지, 스펙터클의 형태로서만 성립하는데, 이것들은 알튀세의 지적처럼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담론들은 지배계급의 수요를 넘어선 영역에서의 진보를 이뤄낼 수 없다.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정치경제적 결정이 언어를 매개로 수행된다. 이는 광고, 미디어, 이미지, 스펙터클의 형태로 생산되고 소비되던 담론이 텍스트, 강령, 테제, 토론, 총화, 합의, 결정문, 평가로 수행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볼셰비키 국가론에서 인민은 평의회를 통해 위와 같은 언어와 텍스트를 경유한 정치경제적 결정을 수행하지만 ‘그 자체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여러 저작들을 통해 드러난 공산주의자당의 입장은 인민들의 ‘외부’에서 인민들의 삶에 혁명적으로 개입한다. 지젝은 「두 혁명의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레닌의 언설을 인용한다. “핵심은 부르주아 국가, 곧 국가 자체를 분쇄하고 상비군, 경찰, 혹은 관료기구는 없을지라도 모두가 사회적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적 사회를 만들어내라는 급진적 정언명령이다.” 그런데 이는 한편으로 온 인민이 그러한 정치경제적 의사결정구조에 참여할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 레닌은 1917년 10월 “우리는 당장 2,000만 명이 아니라 10명만으로 이루어진 국가기구를 작동시킬 수 있다”라고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온 인민이 혁명적 국가기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그 자체로 승인되는 것이다. 평의회는 곧 노동 계급의 일반 의지이고, 평의회를 대리하는 공산주의자당은 인민의 일반 의지를 담지한다. 평의회가 어떻게 공산주의자당을 통제하느냐는 중요한 철학적 명제가 아니다. 몇 명의 구성원이 존재하는지는 상관 없는 공산주의자당이, 노동 계급의 일반 의지를 담지한다는 그 자체가 핵심이다.
가령 소비에트 연방의 신경제정책 시대에 공산주의자당은 볼셰비키의 이상적인 정책들을 수행하기보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이 수행할 법한 정책들, 그리고 인민들의 교육사업에 집중했는데, 이것은 러시아 문명이 곧바로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다는 명제의 부정과 러시아 사회가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러시아 사회의 문명화와 문화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선취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완성된 뒤에야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다는 대기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사고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있어 사회 진보를 향한 정치경제적 결정의 주체는 여전히 부르주아 시민사회이며 매개는 자본이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경제적 주체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일반 의지를 담지하는 공산주의자당이며 매개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맑스-레닌주의의 두 가지 문제는, ‘정치경제적 결정의 주체는 인민의 일반 의지를 담지하여야 한다’는 점, 그리고 ‘정치경제적 결정의 매개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민을 대신하여 정치경제적 결정을 수행하는 당과 인민 대중 그 자체의 구성원에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예컨대 고도로 훈련되지 않은 무학력의 인민 대중에게 인텔리겐치아가 기예를 부리는 것처럼 텍스트를 다듬고 강령을 작성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의회를 통한 토론, 합의, 총화의 과정 속에서 인민의 일반 의지는 확인되고 공산주의자당이 노동 계급의 권력을 대리한다는 사실이 승인되기 때문에, 당의 노동계급에 대한 외부성과 당이 노동계급을 대리한다는 사실은 충돌하지 않는다. 당은 인민의 일반 의지를 수렴하고 집행함과 동시에, 인텔리겐치아에 의해 언어와 관념세계로 구축되는 노동 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인민 대중을 훈련시켜 이들과 정치경제적 의사결정구조 사이의 결합도를 높여 간다.
여기에서 당과 노동계급 사이의 관계, 즉 당의 노동계급에 대한 외부성과, 플라톤의 철인 국가론에서 포착되는 철학자 엘리트와 다른 사회계층에 대한 관계, 즉 엘리트의 대중에 대한 외부성은 유사한 도식적 관계를 보인다. 고도의 이데올로기적 훈련을 받은 인텔리겐치아의 당이 언어를 매개로 인민 대중의 권력을 수행하는 과정은 철학자들이 언어를 이용해 정치경제적 결정을 ‘담당’하는 플라톤의 국가와 다르지 않다. 이는 사회적 역할의 독점이라기 보다는 직능적 분배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공산주의는 물질인가? 그런데 플라톤주의자들에게 무엇이 물질인가는 그다지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참인가, 무엇이 형상인가와 같은 질문들이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가 물질인가 아닌가는 그다지 중요한 논제가 아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의 의식 저 편을 배회하고 있다. 플라톤에게 상기(anamnesis)로서의 배움을 통해 획득된 앎이 진리가 된다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학(Wissenschaft)을 통해 획득된 앎이 진리가 된다. 공산주의라는 인류의 지향점은 요컨대 역사 발전의 객관적 조건들을 학적 방법론을 통해 검토했을 때에 도출되는 진리이다. 맑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 사이의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의 사유 체계는 공통적으로 진리의 철학, 객관성의 철학, ‘총체(totality)’ 혹은 ‘조화(ensemble)’의 철학을 향한 왕도를 선망한다. 그리고 언어의 왕국, 철학자들의 왕국에 도착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맑스-레닌주의를 근대인들을 위한 플라톤주의로 이해하는 것도 그다지 비약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 썼던 개인적 메모, 그리고 <인문학적 개소리>에 기고했던 글을 엮어 갈무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