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 장르들의 계보를 짤막히 따라가보며
트친 분과 말씀을 나누다 든 생각인데, 한 줌도 안 되는 익스트림 메탈 씬에 시시콜콜한 장르 구분이 너무 많아서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겠더라구요. 도식화를 위해 다소 비약한 것도 있습니다만, 이것들의 계보를 따라가보며 구분해보는 짤막한 메모를 써 봤습니다.
익스트림 메탈은 말 그대로 극단적인 메탈일텐데, 이것의 바운더리에는 스래쉬 메탈 속에서도 좀 더 과격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몇몇 밴드들에서부터, 전형적인 데스 메탈/블랙 메탈과 이 두 장르의 갈래들, 그리고 둠 메탈 따위가 들어갈 것 같습니다. (다만 익스트림 메탈과 유사하게 과격하지만 메탈이 아닌 펑크에 뿌리를 둔 ‘~코어’ 장르들은 익스트림 메탈로 분류하기 어렵습니다.)
70년대 말-80년대 초에는 고전 헤비메탈의 중흥기를 연 NWOBHM(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 메탈)이 메탈 대부 블랙 사바스의 뒤를 이어 메인스트림을 타기 시작했고, 여기에 하드코어 펑크의 숨가쁜 드럼을 위시한 속도감과 과격성을 접합시킨 스래쉬 메탈이 샌 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나 독일을 비롯한 언더그라운드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개중 NWOBHM의 흐름 속에서 스래쉬 메탈의 작법을 일부 차용하기 시작하며, ‘Black Metal’이라는 제목의 곡을 쓰거나 사타니즘적 주제를 활용하기 시작한 밴드 베놈은 블랙 메탈의 주제와 뼈대에 대한 청사진을 제공했고, 슬레이어는 스래쉬 메탈의 과격성을 더 밀어붙임과 동시에 소위 ‘브루털 보컬’의 원시적 형태를 보여주며 익스트림 메탈의 폭력적 양식에 대한 뿌리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브루털 보컬’이란 음정을 따라 구성되는 일반적인 보컬에서 벗어나, 음정 없이 ‘성량을 키우고 뭉개고 울리는’ 창법으로 익스트림 메탈 창법의 기본이 됩니다. 크게 저음의 공명에 집중해 ‘꿀꿀’에 비슷한 소리를 내는 그로울링과, 고음의 찢어짐에 집중하는 스크리밍이 있습니다.
베놈과 슬레이어는 최초의 익스트림 메탈 밴드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그 중 베놈은 블랙메탈의 대부로 흔히 추대를 받습니다만, 베놈의 초기 작품들을 본격적인 블랙메탈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는 베놈이 블랙메탈의 주제에 대한 힌트를 주었을 뿐 양식의 전형성을 드러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놈 이후로 소위 ‘퍼스트 웨이브 블랙 메탈’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베놈이 제시한 사타니즘, 안티-크라이스트적 주제의식은 오늘날 사람들이 블랙 메탈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이죠. 여기에 스래쉬 메탈의 과격성을 유지하되 브루털 보컬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고 프로듀싱 환경에서 로우-파이적으로 빚어진, 낮은 해상도의 ‘자글거리는’ 기타 톤을 입힌 밴드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바쏘리나 켈틱 프로스트 같은 밴드들인데, 이들 중 상당수는 블랙 메탈과 스래쉬 메탈 사이의 과도기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과도기적 위치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이 떠올리는 ‘전형적인’ 블랙 메탈의 상이 확립된 건 90년대 초 노르웨이에서 발흥한 ‘세컨드 웨이브 블랙 메탈’ 입니다. 복잡한 구조 없이 음울한 코드 구조와 트레몰로 기타 연주를 자글거리는 톤으로 반복하고 사타니즘적 주제의 브루털 보컬을 내지르며 사악함을 연출하는. 메이헴, 버줌, 엠퍼러 그리고 ‘언홀리 트리니티’ 시절 다크스론 등이 있겠네요.
다만 모든 블랙 메탈이 이러한 주제의 전형성으로 환원된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 바쏘리가 1987년 Blood Fire Death에서부터 선보인 음악들은 블랙 메탈의 자장 안에서 사타니즘이 아닌 페이거니즘, 북유럽 신화를 다뤘고 바이킹 메탈이라는 하위 장르를 열어 젖힙니다. (여기서 다만, 요즈음 바이킹의 이미지와 서사를 본격적으로 내세워 인기를 끌고 있는 아몬 아마스는 멜로딕 데스 메탈의 형식 위에서 음악을 하기 때문에 블랙 메탈의 하위 장르인 바이킹 메탈 밴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후의 많은 블랙 메탈 밴드들이 갖는 ‘종교’적 문법은 이러한 서사의 확장에 영향 받습니다. 이 외에도 개인의 우울에 극단적으로 침잠하는 DSBM, 나치즘(…)을 다루는 NSBM, 좌파 아나키스트 블랙메탈 등 주제의 측면에서 블랙 메탈은 다양한 갈래로 분화됩니다.
한 편 스래쉬 메탈의 형성과 비슷한 시기 데스 메탈이 등장하는데, 이것의 상은 데스의 87년 데뷔 앨범 Scream Bloody Gore에서 오롯이 정립됩니다. 형식적 측면에서, 블랙 메탈과의 단적이고 명확한 차이가 포착되기도 했지요. 스래쉬 메탈의 형식에서 과격성을 더 진전시킨 채, 블랙 메탈에서는 보기 힘든 속도감과 복잡하고 현란한 구조 그리고 기타 솔로들을 활용합니다. 그래서 데스 메탈은 복잡다단하고 치밀한 구성과 대곡지향성 그리고 변박의 활용 등을 위시한 ‘인텔리’적인 프로그레시브 장르들과 쉽게 접합될 수 있었습니다. 스웨덴 밴드 오페스 이후로 여러 ‘프로그레시브 데스 메탈’과 ‘테크니컬 데스 메탈’ 밴드들이 등장했지만 같은 이름의 블랙 메탈 하위 장르는 없다는 점에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어요. 데스의 후기 명반 Symbolic 같은 데에서 이런 경향이 단적으로 드러나죠. 물론 폴란드 밴드 베헤모스의 음악처럼 데스 메탈의 형식에 블랙 메탈의 주제와 사악한 분위기를 접합한 ‘블랙큰드 데스 메탈’ 같은 장르도 있습니다.
한 편 두 장르의 형식에 서정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들 역시 있었는데, 관현악의 레이어나 키보드를 도입하고 캐치한 멜로디로 리프를 구성해 집어넣는 방식이었지요. 심포닉 블랙 메탈이나 멜로딕 데스 메탈 같은 것들인데요. 특히 카르카스의 앨범 Heartwork와 카르카스를 때려치고 나온 마이클 아모트가 차린 밴드 아치 에너미는 이런 장르들이 ‘상업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장르의 과격성을 소거했다는 지점에서 이런 장르들은 익스트림 메탈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블랙 메탈과 데스 메탈의 기타 톤에 차이가 있다는 점은 소위 포스트-블랙 메탈이나 블랙게이즈로 불리는 요즈음 장르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메탈 기타 톤, 요컨대 하이-파이 환경에서 EQ의 베이스와 하이 레인지를 부스트하고 미드레인지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얻어낸 육중한 톤과 달리 로우-파이 환경에서 자글자글하게 만들어지며 사악한 ‘분위기’와 ‘잔향’을 자아내는 블랙 메탈의 기타 톤은, 리버브의 활용을 통해 짙은 잔향과 부유하는 공간감을 빚어내며 몽환을 선사하는 포스트 록/슈게이징 장르의 기타 톤메이킹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블랙 메탈과 포스트 록/슈게이징을 접합하려는 시도들이 최근에는 두드러지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