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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자 Apr 21. 2021

이기 팝 사용 설명서

영원히 늙지 않는 펑크 록의 대부,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음악

미국 대중음악시장에서 '어둠의 제왕'이라는 호명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 20세기 서구 반문화의 현현과도 같은 인물 이기 팝. 그는 펑크 반문화의 등장 이전부터 펑크족들의 자유분방한 음악 문법과 애티튜드를 선보여 왔다. 비록 그 자신은 주류 음악시장에 진입하지 못했지만, 섹스 피스톨스에서 소닉 유스와 너바나에 이르는 펑크-얼터너티브 씬의 혁명가들은 이기 팝이라는 이념적 토대 위에서 대중음악시장의 진보를 견인해 왔다. 이 글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펑커(punker)이자 혁신적인 싱어송라이터, 그리고 위악적인 위트와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이기 팝의 예술 세계를 톺아보는 '이기 팝 사용 설명서'다.


들어가며: 이기 팝은 누구인가
"펑크의 대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로큰롤 밴드, 스투지스." - 영화 감독 짐 자무쉬, 다큐멘터리 영화 <김미 데인저>에서 이기 팝과 그의 밴드 스투지스에 대해 인터뷰하며.


  '이기 팝'이라는 예명으로 더 잘 알려진, 미시간 출신의 펑크 예술가 짐 오스터버그. 그는 로큰롤의 지난한 세월 속, 주류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가 다다르지 않는 지하에서 온갖 '최초'의 역사를 그려 왔다. '펑크'라는 조어가 만들어지기도 이전이었던 1969년, 이기 팝은 '스투지스'라는 펑크 밴드로 데뷔했다. 히피즘에 영향 받은 주류 록 음악이 맥시멀리즘의 문법에 천착하던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사이, 간결한 코드의 단순성 위에서 야수와도 같은 과격성과 정동을 표출하는 스투지스의 퍼포먼스는 위태로웠지만 독보적이었다. 60년대 개러지 록에서 출발해 펑크와 하드 록, 뉴 웨이브와 아방가르드로 확장되어가는 이기 팝의 시선은, 스투지스의 이른 해체와 솔로 데뷔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현재성을 가진 채 대중음악문법의 전위에 머무르고 있다. 2010년에는 스투지스의 일원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2020년에는 그래미 평생 공로상 수상자 목록에 이름을 올리며 역사가 되어버린 이기 팝이지만, 그는 여전히 지치지 않는 활력으로 무대 위에서 생동하고 날뛰며 오늘의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1947~1967: 제임스 뉴웰 오스터버그, '이기 팝'이 되다
유년 시절의 이기 팝이 처음으로 배운 악기는 드럼이었다.


  1947년 미시간의 디트로이트 근교에서 태어난 제임스 뉴웰 오스터버그. 훗날 이기 팝으로 불리게 되는 어린 소년의 삶은 그다지 녹록치 않았던 것 같은데, 유년 시절의 그는 모부와 함께 트레일러에서 생활했다. 조그마한 트레일러의 거실에는 드럼 세트가 있었고, 오스터버그는 방과 후, 주말 내내 온 집이 꽝꽝 울리도록 드럼을 치고는 했다. 4학년 즈음 학교에서는 포드 자동차 공장으로 견학을 갔는데, 제임스는 철판을 자르는 기계가 내뿜는 거대한 소음에 매료되었고 여기에서 어떤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 기타나 전자 악기들을 활용해 여러 소음들을 만들고 전시하고 경합시키는 노이즈 록이나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문법이 떠오르는 대목. 이것들도 이후 얼터너티브라는 경향 아래에서 이기 팝과 스투지스의 일정한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장르 음악들이다.


  1965년, 제임스는 고등학교 로큰롤 밴드 '더 이구아나스'의 공연을 보게 된다. 십대 청소년들로 이루어진 작은 밴드들이 공연하는 클럽이 있었고, 이 곳의 밴드들은 블루스나 개러지 록을 연주했다. 제임스는 어릴 때부터 관심을 좇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는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관심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했고, 무대에 난입해 우당탕탕 드럼을 쳤다. 이후 제임스는 이구아나스에 가입해 공연을 하다 부둣가의 공연장을 무너트리기도 했고, 1966년에는'프라임무버스'라는 밴드에 가입해 블루스 음악을 배우기도 했다. 이후 사용하게 된 '이기 팝'이라는 예명은 밴드 이구아나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 하지만 취미로 음악을 하는 이 십대 밴드들은 제임스에게 너무나 작은 우물이었고, 제임스는 진지한 애티튜드로 음악을 하는 전업 뮤지션들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시카고로 떠난다. 시카고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를 중심으로 한 블루스 음악의 중심지였고, 여기에서 제임스는 자신의 말마따나 "백인들을 위해 연주하며, 10달러짜리 공연에도 최선을 다하는" 조니 영, 빅 윌터 홀튼과 같은 블루스 뮤지션들의 공연을 접했다. 블루스에 매료된 제임스는 그들과 함께 음악을 하고 싶어 했지만, 어느 날 문득 백인인 자신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에 동화되어 음악을 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제임스는 드럼을 관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1967~1971: 최초의 펑크 밴드, 스투지스의 결성
1970년, 신시내티 팝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스투지스.


  고향 마을 앤 아버로 돌아온 이기 팝은 이런 저런 일거리를 찾아 전전하다가 론 애쉬튼과 스콧 애쉬튼 형제를 만나게 된다. 론 애쉬튼은 베이스를 종종 연주했었고, 중학교를 중퇴하고 양아치 생활을 하던 그의 동생 스콧 애쉬튼은 제임스를 졸졸 따라다니며 드럼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이들은 모두 영국 록 음악에 빠져 있었고, 론은 학교를 빼먹고서는 영국으로 날아가 더 후의 공연을 보고 오기도 했다. 로큰롤 키드였던 애쉬튼 형제와 제임스는, 실제로 하는 건 딱히 없지만 그냥 '있어 보이려고', 자기들이 '더티 셰임즈'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을 한다며 떠벌리고 다녔다. 이 가짜 밴드는 나중에 진짜 록 음악을 연주하는 '사이키델릭 스투지스'라는 밴드가 되었다. 이후 앤 아버와 디트로이트 전역에서 정치적 소요 사태가 일어났던 1967년, 애쉬튼 형제와 제임스는 환각제와 삽을 들고서는 시위의 열기 속에 버려진 집 하나를 점거했다. 이들은 여기에서 함께 살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시간을 보내며 음악적 영감을 공유했다. 


  1960년대 말, 제임스의 고향 마을 앤 아버는 미시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적, 예술적 급진주의 운동들의 해방구 역할을 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존 케이지와 같은 전위 음악가들은 이 시기 미시간 대학교를 방문해 공연을 하기도 했다.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던 제임스는 자연스레 새롭고, 해체적이고, 파괴적인 전위 음악들에 귀를 열게 되었다. 여기에서 제임스는 마리화나와 LSD에 취한 채, 더 벤쳐스나 존 콜트레인 같은 실험적인 록과 재즈 음악에서부터,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위시한 뉴욕의 아방가르드, 존 케이지와 같은 현대 음악까지 섭렵하며 취향의 폭을 넓혀 갔다. 현대 음악이 선보이는 미니멀리즘에 매료된 제임스와 그의 패거리들은, 원시적인 리프를 만들기 위해 직접 악기를 설계하는가 하면, 심플한 코드와 테마를 주구장창 반복하며 연주하고, 기타와 목소리로 소음과 괴성을 만들고 이를 차곡차곡 쌓아가기도 했다. 


스투지스에 영향을 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White Light/White Heat".


  그러던 중, 제임스는 미시간 대학교에 공연을 하러 온 도어스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약에 취한 채 몽롱한 시선으로 관객들을 응시하고 노래하며 욕지거리를 내뱉는 짐 모리슨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었다. 드럼을 치던 제임스는, 이제 스스로 무대 위를 날뛰며 짐 모리슨처럼 관객을 장악하는, 광기 넘치는 프론트맨이 되기로 결심한다. 페르소나 '이기 팝'의 탄생이었다.


'이기 팝'의 페르소나가 만들어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도어즈의 "Light My Fire" 라이브.


  그 무렵 애쉬튼 형제의 자매 캐시 애쉬튼은 MC5라는 밴드의 기타리스트 프레드 스미스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존 싱클레어가 이끄는 MC5는 영국 R&B 리듬에 영향을 받은 개러지 록 밴드였다. 존 싱클레어는 MC5와 함께 단순하고, 과격하고, 시끄러운 록 음악을 선보이며 로큰롤과 20대 반문화의 대변자처럼 행동하던 인물이다. 그러던 1968년 존 싱클레어가 체포되자 미시간과 시카고에서는 사회운동이 불처럼 들끓었고, 그 한가운데에서 사이키델릭 스투지스는 MC5와 함께 공연을 했다. 그 자리에는 대형 음반사 엘렉트라 레코즈의 매니저 대니 필즈가 나와 있었다. 대니 필즈는 사이키델릭 스투지스와 MC5가 가진 들끓는 잠재력을 알아보고 음반 계약을 맺었다. 사이키델릭 스투지스는 이름에서 거추장스러운 '사이키델릭'을 떼어버리고, 전설적인 데뷔 음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스투지스의 1969년 데뷔 음반 <The Stooges>.


  스투지스는 곧바로 음반 작업에 들어갔고, 이 시기 론 애쉬튼은 펑크 록의 역사를 뒤바꾸는 위대한 두 개의 기타 리프, "I Wanna Be Your Dog"과 "No Fun"을 순식간에 써 내려갔다. 단순하고도 위압적인 "I Wanna Be Your Dog"의 리프에 감탄한 이기 팝은 가장 거대한 존재에 대한 가사를 써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신(God)이었는데, 이걸 거꾸로 뒤집으면 개(dog)가 되었다. 그렇게 이기 팝은 '네 개가 되고 싶다'는 가사를 적어 내려갔다. 전 세계의 BDSM 문화 속에서 가장 많이 울려 퍼진 곡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스투지스의 "I Wanna Be Your Dog" 공식 음원.


  미시간의 촌뜨기들이었던 스투지스는, 앨범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 스튜디오가 있는 뉴욕으로 여행을 떠났다.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것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비올리스트이자 아방가르드의 대가인 존 케일이었다. 이들은 2분에서 3분 짜리의 간결한 아이디어로 곡을 쓰고 남은 부분들은 기나긴 즉흥 리프 연주들로 채워 갔다. 존 케일의 감각이 돋보인 부분은 옴 챤트를 멜로디로 만든 10분짜리 대곡 "We Will Fall"이다. 사이키델릭하고 앰비언트하게 짜여진 노이즈를 토대로 주술적인 가사와 챤트가 전개되는 "We Will Fall"은 스투지스를 단순한 로큰롤 밴드가 아닌 당대 아방가르드의 거목으로 만들어 줬다.


"We Will Fall"의 공식 음원.


  스투지스의 데뷔 앨범은 1969년 4월 발매되지만, 엘렉트라 레코즈가 지원을 하지 않아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앨범은 빌보드 차트 109위에 올랐을 뿐이었고, 싱글이었던 "I Wanna Be Your Dog"과 "1969"는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스투지스는 최초로 스테이지 다이빙과 크라우드 서핑을 한다던가, 나체로 공연을 한다던가, 관중들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한다던가, 무대에서 자해를 한다던가 하는 이기 팝의 과격하고 정동적인 퍼포먼스로 지하에서 점차 악명을 쌓아 갔다. 이들은 1970년 2집 <Funhouse>를 작업하기 위해 LA로 떠난다.


스투지스의 2집 <Funhouse> 앨범 커버.


  이 시기 스투지스의 멤버들은 '더욱 공격적인 음악'에 천착하며 실험을 벌이는가 하면, 한 편으로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위시한 아방가르드 재즈 음악이나 제임스 브라운 같은 훵크 음악의 요소들을 수용하고자 했다. 이들은 도중 색소포니스트 스티브 매케이의 약에 취한 듯한 공연을 보게 되었다. 이기 팝은 스티브 매케이를 스투지스에 데려왔다. 이들이 의기투합하여 완성된 <Funhouse>는 간결하고 거친 기타 리프와 이기 팝의 괴성, 그리고 스티브 메케이의 색소폰 사운드가 소음처럼 자리잡은 채 난데 없이 경합하는 앨범이 되었다. "Down on the Street", "Loose", "T.V. Eyes" 같은 곡들을 통해 당대에 가장 시끄러운 음악을 선보였던 <Funhouse>는 또다시 상업적 실패를 맛보지만, 펑크 록과 하드 록 그리고 메탈 음악의 사운드메이킹 방식을 미리 선보이는 개척자로서의 역할을 하며 컬트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Funhouse>의 수록곡 "T.V. Eye".


  시간이 지나며, 스투지스는 커다란 페스티벌들에 불려 다니는 밴드로 자리를 잡았다. 이 무렵 목줄을 차고 산책하는 개를 우연히 보게 된 이기 팝은 그게 퍽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빨간 개 목줄을 사서 차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는 이기 팝 페르소나의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70년도, 신시내티 팝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스투지스.


  이들은 좌충우돌 공연 여행을 했다. 관객을 향해 뛰어 든 이기 팝은 사람들이 피하는 바람에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이빨이 깨지기도 했고, 멤버들은 마약과 술에 쩔어 살았다. 그 바람에 악기를 가져오는 것도 까먹은 채 공연을 하기도 했고, 관중들에게 폭동을 선동해 공연장의 펜스를 무너트리고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스투지스에게는 프로 의식이 부족했고, 60년대 반문화는 멤버들의 유대와 건강을 망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스투지스의 세 번째 앨범 발매가 음반사에서 거절을 당했고, 이기 팝은 밴드를 쉬기로 결정했다. 이기 팝은 고향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약물에 손을 대기만 했다.


1972~1976: 이기 앤 더 스투지스의 부활과 몰락
스투지스의 앨범 <Raw Power>의 앨범 커버.

  

  한동안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던 이기 팝은 1972년 불현듯 뉴욕으로 떠나게 된다. 뉴욕에서는 떠오르던 글램 로커 데이비드 보위가 공연을 하고 있었고, 무대 위에서의 연극적 자아인 페르소나를 구축하고 전시하는 방식을 고민하던 데이비드 보위는 이기 팝과 MC5가 공연에서 선보이는 야수적인 퍼포먼스와 좌중을 압도하는 방식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 같다. 보위는 이기 팝을 공연에 초청했고, 그렇게 이기 팝과 데이비드 보위의 첫만남이 이루어졌다. 며칠 뒤, 데이비드 보위는 런던의 작업실에 이기 팝을 초대했다. 이기 팝은 기타리스트 제임스 윌리엄슨을 데리고 영국으로 떠나, 데이비드 보위의 프로듀싱 아래에 재결성된 스투지스의 새 앨범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Raw Power>였다. 새 앨범은 충만한 그루브와 힘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Raw Power>의 수록곡, "Gimme Danger".


  이 무렵 이기 팝은 데이비드 보위와 글램 록의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허무는 화려한 분장에 영향을 받아 무대 위에서 이를 시도했고, 이를 이전의 자신이 수행해오던 과격한 퍼포먼스와 결합시키기 시작했다. "Search and Destroy", "Gimme Danger", "Raw Power"같은 질주하는 명곡들이 이기 팝과 제임스 윌리엄슨의 손에서 탄생했다. <Raw Power>는 콜롬비아 레코드와의 계약을 따내고 시장에 나올 수 있었지만, 음반사는 곧 '이기 팝의 부도덕한 행동들이 회사에 해를 끼친다'며 스투지스와 결별을 한다. 회사는 스투지스의 공연도 허락하지 않았다. 의욕이 떨어진 스투지스의 멤버들은, 밴드의 두 번째 해체를 결정했다.


1976~1978: 베를린의 이기 팝, 삶에 대한 욕망으로 일어서다
베를린에서의 이기 팝(왼쪽)과 데이비드 보위(오른쪽).


  (이 문단은 제 이전 글 "데이비드 보위 사용 설명서"를 일부 인용했습니다.)


  이기 팝은 스투지스 시절 번 돈을 모조리 마약에 써 버리고는 스스로를 망쳐가며 지내고 있었다. 약물 중독을 이겨낼 수 없었던 이기 팝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Raw Power>를 함께 작업했던 데이비드 보위는 이기 팝의 병문안을 온 몇 안 되는 친구였다. LA에서 지내던 당시의 보위는 스스로도 코카인과 암페타민 중독에 시달려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보위는 불안정하고 분열적인 자아를 통해 만들어 낸 앨범 <Station to Station>(1976)의 투어에 이기 팝을 데리고 다녔는데, 이 시기 보위와 이기 팝은 뉴욕에서 마리화나 소지죄로 체포되기도 했다. 보위는 친구 이기 팝과 함께 조용한 유럽으로 떠나 요양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기 팝과 데이비드 보위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스위스였지만, 언론의 관심은 이들을 스위스까지 따라왔고 마약 중독 증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스위스를 떠나 서베를린으로 향한다.


이기 팝이 데이비드 보위의 집에서 마약을 하다 TV에서 여자친구가 튀어나오는 환각을 본 경험을 토대로 쓰인, 보위의 앨범<Station to Station>의 수록곡 "TVC15"


   베를린에 도착한 보위와 이기 팝은, 집을 바로 구하지 못해 잠시동안 에드거 프로스라는 인물의 집에 머물렀다. 에드거 프로스는 크라우트록이라는 장르의 선구자 격인 밴드 탠저린 드림의 리더였는데, 이는 당시 대중에게 새롭게 소개된 만능 전자악기 신시사이저를 활용한 실험 음악이었다. 이와 교류하던 보위는 전자악기가 선보일 수 있는 창작 문법의 확장성을 진지하게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크라프트베르크, 애쉬 라 템펠, 노이!, 그리고 캔과 같은 크라우트록 밴드들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한 편으로 에드거 프로스는 보위의 요양을 도우며, 그에게 서베를린의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여기에서 활동하는 전위적인 뮤지션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1974년 발매된 탠저린 드림의 크라우트록 명반 에 수록된 동명의 타이틀 곡.


  보위와 이기 팝은 곧 아파트를 마련해 동거를 시작했고, 음악 작업을 진행할 스튜디오도 구했다. '한자'라는 이름의 스튜디오는 베를린 장벽 바로 근처에 있었고, 이는 보위로 하여금 냉전 체제의 비인간성과 모순을 끊임없이 상기하도록 만들었다. 보위는 작업실에 자신의 오랜 프로듀서 토니 비스콘티 그리고 실험적인 글램 록 밴드 록시 뮤직 출신의 영국인 뮤지션 브라이언 이노를 초청했다. 브라이언 이노는 록시 뮤직의 리더 브라이언 페리와의 갈등 속에 밴드를 탈퇴한 뒤 전자 음악의 가능성에 집중하며 솔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는 <Discreet Music>(1975) 그리고 이후에 발매되는 <Ambient 1: Music for Airports>(1978)와 같은 혁신적인 작품들을 통해, 공명하는 전자음들의 미니멀리즘적 배치를 통해 텅 빈 공간을 구축해가는 전위 음악 '앰비언트'의 청사진을 그려가고 있었다. 데이비드 보위는 <Discreet Music>을 인상깊게 들은 바 있었고, 이노의 혁신적 감각을 자신의 새 음악에 적용하고 싶어했다. 크라우트 록 밴드 하모니아와 작업하던 브라이언 이노는, 이를 금방 마무리하고 보위의 스튜디오에 합류한다. 데이비드 보위, 이기 팝, 토니 비스콘티, 브라이언 이노라는 아방가르드 음악의 드림 팀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베를린 시절의 보위와 이기 팝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브라이언 이노의 앰비언트 명반 <Discreet Music>.


  보위가 한자 스튜디오에서 처음으로 작업한 것은, 이기 팝의 솔로 데뷔 앨범 <The Idiot>(1977)이었다. 펑크 록의 단순성 위에 전자 음악의 불협화음을 교차시키는 실험적인 로큰롤 앨범은, 비록 보위가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완성한 앨범 <Low>(1977)보다 몇 달 늦게 발매되었지만 작업은 먼저 이루어졌기에 보위가 앞으로 펼치는 아방가르드 음악들의 징후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 편 <The Idiot>의 미니멀하고 어두운 록과 전자 음악 사운드들은, 조이 디비전, 수지 앤 더 밴시스와 같은 포스트 펑크와 고딕에서부터, 디페쉬 모드, 나인 인치 네일스를 위시한 일렉트로니카, 인더스트리얼에 이르는 여러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Sister Midnight"과 나중에는 데이비드 보위의 앨범에 다시 수록되는 "China Girl"이 싱글로 발매되었고, 신나는 그루브를 토대로 질주하는 "Funtime"이나 전자 음악이 빚어내는 소음의 어두운 질감이 인상적인 "Nightclubbing"도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The Idiot>의 수록곡 "Nightclubbing".


  <The Idiot>의 콘서트 투어를 마친 이기 팝은,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다음 앨범을 순식간에 작업해버리기로 결정한다. 실험적인 전작과 달리 단순한 코드와 간결한 구성의 이기 팝 다운 로큰롤 사운드를 담은 새 앨범은 모든 작업을 8일 안에 끝내버린다는 계획 아래에 완성되어 갔다. 나중에 데이비드 보위와 틴 머신이라는 밴드를 결성하게 되는 헌트 세일즈와 토니 세일즈 형제가 앨범의 세션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이기 팝을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앨범 <Lust for Life>(1977)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Lust for Life>의 앨범 커버.


  앨범은 펑크 록의 역사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드럼 라인을 가지고 있는 타이틀 곡 "Lust for Life"로 시작한다. 마약 중독으로 스러져 가던 이기 팝이 삶의 대한 욕망을 잔뜩 쥐고서는 무대 위로 돌아와 날뛰는 과정을 연상케 하는 "Lust for Life"는, 이기 팝의 화려한 부활을 상징한다.


스코틀랜드 펑크 족들의 과격한 일상을 다룬 영화 <트레인스포팅>에 삽입된, "Lust for Life"의 뮤직 비디오.


  그 밖에도 앨범은 생동하는 에너지를 선사하는 곡들로 가득 차 있다. "Sixteeen"과 "Some Weird Sin" 같은 신나는 로큰롤과, 짐 모리슨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도시를 산책자의 시선을 통해 재구성하는 "The Passenger"같은 넘버들이 대표적이다. 이 단순하고 신나는 앨범이 성공하면서, 이기 팝은 스투지스의 해체 이후인 1975년 새로운 음반사와의 계약을 꿈꾸며 제임스 윌리엄슨과 함께 작업해두었던 <Kill City>(1977)도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이기 팝을 대표하는 곡 "The Passenger"의 뮤직 비디오.


1978~1981: 이기 팝, 뉴 웨이브의 흐름을 타다
1980년도의 이기 팝. 후배 뉴 웨이브 밴드 블론디와 함께.


  데이비드 보위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이룬 이기 팝의 솔로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1976년도부터 주류화된 펑크 운동과 70년대 말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 뉴 웨이브 운동의 영향도 있었는데, 상업적으로 성공한 펑크와 뉴 웨이브 뮤지션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기 팝을 자기들의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선배로 언급해줬기 때문이다. 라몬즈, 섹스 피스톨즈, 클래시, 댐드와 같은 펑크 록 밴드들과 뉴 오더, 블론디 같은 뉴 웨이브 밴드들의 뿌리에는 스투지스가 있었고, 이들은 무대 위에서 종종 스투지스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와의 꾸준한 작업도 이기 팝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보위를 따라 들어간 소속사 RCA는 이기 팝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이기 팝은 RCA를 나와 아리스타 레코드로 적을 옮긴다. 그리고 세 장의 앨범, <New Values>(1979), <Soilder>(1980), <Party>(1981)을 데이비드 보위의 도움 없이 발매한다. 펑크 록과 뉴 웨이브의 경향을 담은 세 장의 앨범은 매력적이었지만 상업적으로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New Values>의 수록곡 "I'm Bored"의 뮤직 비디오.


1981~2003: 이기 팝, 하위문화의 아이콘
1986년 뉴욕 리츠에서의 공연 실황 앨범 커버.


  1980년 이기 팝은 <I Need More>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발매했는데, 여기에는 앤디 워홀이 서문을 써 줬다. 1966년 앤 아버 영화 축제에서 이기 팝을 만난 적이 있던 앤디 워홀은, 그가 이렇게 거물이 될 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나. 


  <The Idiot>이나 <Lust for Life>만큼의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기 팝은 뉴 웨이브를 토대로 하드 록, 메탈 사운드를 뒤섞는 실험을 하며 정력적인 음악 활동을 계속해 갔다. 섹스 피스톨즈의 스티브 존스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와 함께 영화 음악을 만들기도 했고, 류이치 사카모토의 작업에 참여하는가 하면, 자신의 정규 앨범을 내기도 했다. 1986년작 <Blah-Blah-Blah>에 실린 싱글 "Real Wild Child"나, 뉴 웨이브 밴드 B-52's의 케이트 피어슨과 함께 한 듀엣곡 "Candy"는 영국과 미국 차트 상위권에 들며 선전하기도 했다. 


  펑크와 뉴 웨이브의 시대가 지나고 소닉 유스, R.E.M., 토킹 헤즈, 픽시즈, 너바나 등의 선구자들이 얼터너티브 음악의 문을 열어 젖힌 90년대가 되자, 이기 팝은 얼터너티브 문화의 대부이자 뿌리로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 되었다. 수십만의 관중이 모인 99년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플리는 "저는 이기 팝을 좋아해요!"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이 무렵부터 이기 팝은 영화배우로서도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섹스 피스톨스의 멤버 시드 비셔스와 그의 연인 낸시 스펑겐의 일화를 다룬 영화 <시드와 낸시>에 카메오로 등장하며 영화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펑크 록 문화의 세례를 받은 힙스터 영화 감독 짐 자무쉬의 영화 <커피와 담배>를 위시로 여러 영화에 얼굴을 비추었다. 짐 자무쉬는 이기 팝의 대단한 팬으로, 이후 스투지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미 데인저>의 메가폰을 잡는가 하면, 2019년작 <데드 돈 다이>에는 이기 팝을 무려 '좀비' 역할로 출연시키기도 했다. 한편 하위문화의 아이콘이 된 이기 팝을 오마주하려는 시도들도 많이 있었는데, 스코틀랜드 펑크족들의 방탕한 삶을 다룬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트레인스포팅>에서 등장인물들은 스투지스의 포스터가 붙은 집에 모여 내내 이기 팝의 음악을 듣고, 데이비드 보위를 위시한 글램 록 문화를 조명하는 영화 <벨벳 골드마인>에서는 이기 팝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등장해 "Gimme Danger"를 부른다.


2003~: 스투지스의 재결성과 현재
노년에도 정력적인 투어를 펼치는 이기 팝.


  2003년에 발매된 이기 팝의 정규 앨범 <Skull Ring>에는 그린 데이, 썸 41과 같은 후배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한편으로 세션 라인업 중에는 스투지스를 함께 했던 애쉬튼 형제도 들어 있었다. 이는 스투지스 재결성의 신호탄이 되었고, 다시 뭉친 스투지스는 두 장의 새 앨범, <The Weirdness>와 <Ready to Die>를 발매한다. 2009년에는 스투지스의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소식이 발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렵 론 애쉬튼은 심장마비로 인해 60세의 나이로 급사를 했고, <Raw Power> 시절 이기 팝과 함께 했던 제임스 윌리엄슨이 론 애쉬튼의 빈자리를 메꿨지만, 스투지스는 결국 지루하고 바쁜 투어 일정을 내려놓고 밴드를 해체하자는 결정을 내린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해체 이전 스투지스가 서울을 방문해 2013년 씨티브레이크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공연을 했다는 것 정도랄까.


  스투지스는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졌지만, 이기 팝 본인은 여전히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투어와 앨범 작업을 하고 있다. 2016년에 발매한 <Post Pop Depression>은 이기 팝의 커리어 속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흥행한 수작이 되었다. 카이어스와 퀸즈 오브 더 스톤 에이지를 거치며 무겁고 걸쭉한 질감의 스토너 록이라는 장르를 개척해 온 조쉬 하미는 앨범에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자신만의 특색을 집어 넣었고, 당시 전성기를 맞이했던 악틱 몽키스의 드러머 맷 헬더스 그리고 퀸즈 오브 더 스톤 에이지와 잭 화이트의 밴드 데드 웨더에서 활약하던 기타리스트 딘 페르티타가 세션으로 참여했다. 여전히 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이기 팝은, <Post Pop Depression>의 앨범 홍보 투어를 비롯한 여러 투어에서 웃옷을 집어던지고 관객석으로 뛰어들며 날뛰는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Post Pop Depression>의 수록곡 "American Valhalla".


나는 왜 이기 팝을 사랑하는가


시드니에서 "Raw Power"를 공연하는 이기 앤 더 스투지스.


  이기 팝의 동시대에는 위대한 록 스타들이 많았다. 지미 페이지의 현란한 기타 연주, 혹은 로버트 플랜트나 프레디 머큐리의 화려한 보컬은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하지만 이기 팝은 다가갈 수 없는 엘리트가 되어버린 공룡 밴드들의 반대편에서, 모두가 생산할 수 있고 또 소비할 수 있는 해방적인 로큰롤의 장을 열었다. 하드코어 펑크 이전의 하드코어 펑크가 가지는 정동적 단순성과 야수성, 3코드 리프와 자유분방하게 내지르는 보컬에서 나오는 에너지, 이기 팝의 자신만만하고 과격한 퍼포먼스가 내뿜는 카리스마는 펑크 문화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사랑해 마지않을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것이 내가 이기 팝을 듣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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