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이야기
우연한 기회였다. 준공 때 심은 나무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둘씩 뽑혀 나갔다. 그 자리에 뭘 심을까 하다가 장미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3년간 여러 꽃을 키웠지만 내 마음 속에는 장미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왜냐면 내가 좋아하는 유튜브속 가드너는 꼭 장미를 키우기 때문이었다. 병해가 많아 키우기 어렵다는 말에 주저 했지만 이제 희망을 실현할 때가 왔다. 장미농원 사이트의 황홀한 미모의 사진을 보며 장미를 골랐다. 며칠 간을 기다리던 장미 박스가 왔고, 온도가 적당하고 거센 바람이 없는 봄날 아침 정원으로 나갔다.
먼저 땅 장미 3종류를 심었다. 장미인지라 특급 대우를 2가지 받았다. 첫 번째는 전용 흙을 사용했다. 장미 전용 흙은 습기를 머금은 곱고 검은 모래흙처럼 보였다. 두 번째는 땅을 최대한 깊게 파줬다. 땀이 흐를 만큼 열심히 구덩이를 파서 물을 가득 채우고 장미 전용 흙을 붓고 장미를 심었다. 그리고 덩굴장미를 2종류를 심었다. 덩굴장미는 지지할 구조물이 필요하여 장미 휀스 2개와 아치 1개를 샀다. 아치는 정원 입구에 설치했다. 잔디를 파내서 아치를 박을 구멍을 냈다. 아치의 중심을 맞추고 구부러지지 않게 위치를 잡았다. 장미를 심을 부분에 잔디와 흙을 파내고 흙을 채웠다. 이제 장미 뿌리를 넣고 흙을 덮어준 뒤, 장미를 묶은 끈을 끊었더니 덩굴장미 자스미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휀스도 마저 조립하여 빨간색 덩굴장미 "플로렌티나"를 땅에 심었다. 이 작업을 마치고 장미 줄기를 동여 매어 놓은 끈을 끊는데 결혼식 신부 얼굴을 처음 보는 것 마냥 마음이 떨렸다. 펼쳐진 부채 모양처럼 장미 줄기를 휀스에 묶어서 고정했다. 이렇게 비료와 땅파기의 힘이면 장미가 잘 자랄것 같았다.
3주가 지난 뒤 그늘에 심은 빨간 장미는 죽어가기 시작했다. 크지도 않고 줄기가 쪼그라들었다. 수세가 너무 좋아 짐승 장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라는데, 음지에서는 아무리 수세 좋은 빨간 장미도 안 되는구나를 깨달았다. 꽃은 커녕 매달려 있던 잎도 떨구기 시작하고 거미들이 신나게 거미줄을 여기저기 치기 시작했다. 휀스까지 마련했는데 나의 첫 장미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 있는지 낙담하고 엄한 생명을 주문해서 이렇게 바로 초록별로 보내다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땅장미 3그루 에도 비상이 걸렸다. 장미 뒤에 있는 단풍나무가 급성장을 해서 그늘이 크게 생겼다. 그늘져서 햇볕을 못 받으니 보라 장미가 줄기가 웃자라기 시작했다. 뒤에 심은 델피니움까지 괴이한 모양으로 목을 쭉 빼고 있었다.
내 인생 첫 장미에 첫 꽃인 데 이렇게 허망하게 보낼 수 없었다. 4월 마지막 날인데도 이웃집의 성질 급한 장미는 한두 송이 벌써 꽃피기 시작했다. 단풍나무를 급하게 가지치기해서 장미에 빛이 가도록 했다. 그래도 웃자람이 나아지지 않자 화분으로 옮겨서 빛이 잘 드는 곳으로 옮겼다. 덩굴장미는 죽음을 기다리느니 양지바른 야치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빨간 장미를 휀스에 묶은 끈을 풀고 정성껏 심어놓은 장미 뿌리를 다시 퍼냈다. 분홍 장미 아치의 비어 있는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빨간 장미의 쪼글 해진 줄기와 시들한 잎사귀가 새 자리에서 회생하기를 바라며 거미줄과 시든 잎을 떼내고 물과 비료를 줬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4월은 마무리를 향해갔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니, 모란꽃이 어찌나 꽃이 큰 지 거인 꽃처럼 멀리서도 눈길을 잡아챘다. 연두색 불두화의 꽃망울이 탐스럽게 눈송이를 부풀렸고, 봄비 한 번 시원하게 오면 초록 잎사귀들이 어찌나 쏟아지던지 정원은 하루 만에 녹음을 되찾은 듯했다. 무엇보다 하늘을 향해 한껏 고개를 치든 장미 꽃봉이 다가올 5월의 장미 축제를 예고했다. 우리 집도 장미꽃이 언제 피려나 두근거리며 지켜보는데, 여기저기 장미 꽃봉이 빵빵하게 부풀면서 은근하게 장미색이 비춰보였다. 장미는 이런 급한 가드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작은 꽃봉을 부풀릴 뿐이었다. 내 생애 첫 장미의 첫 꽃이 대체 언제 오려나 오매불망 기다렸다.
붉은 장미는 자리를 옮기고 몇 주 동안 달고 있던 잎을 다 떨궜다. 잎부터 시들어가는 장미의 줄기를 잘랐더니 줄기도 마저 시들어 간다. 그 후로 며칠 잠잠하더니 새 잎이 조금씩 돋기 시작했다. 빨간 장미라 새잎도 붉은빛이 도는 듯했다. 꽃봉도 없고 늦었지만 열심히 작은 손바닥 같은 이파리를 사방으로 펼쳐내고 있다. 작고 작은 잎이 돋아나 점점 커지고 태양을 향해 펼쳐가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신기하게도 쪼글쪼글했던 줄기도 펴지고 줄기도 돋아나면서 다시 생명력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건너편 분홍 장미에 비해 잎도 적고 꽃봉도 없어서 늦지만 성장세가 아주 좋다. 한낮 식물이지만 장미의 변화가 가슴을 울렸다. 쨍쨍한 곳에 심은 분홍 장미는 별일 없이 잘 컸지만 좋지 않은 환경에 심은 붉은 장미는 병들고 벌레들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태양 쨍쨍한 곳으로 옮기니 결국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화분으로 옮긴 땅장미들도 크기는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굵은 줄기와 빛나는 잎을 회복했다.
5월도 중순을 향해 갔다. 장미가 우수수 피어났다. 진 꽃을 잘라줘야 또 다른 장미가 핀다고 해서 많이 진 장미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잘라줬다. 처음에는 세 송이, 두 번째에는 스무 송이 넘게 잘라줬다. 장미를 키워보는 첫 해인데 이렇게 많은 꽃 선물을 주다니 감격스럽고 행복했다. 아침마다 정원의 장미를 확인하고 까치발을 들어 분홍 장미 향을 맡았다. 상큼한 사과향이 났다. 땅 장미 중에 흰 장미를 제일 늦게 샀는데 제일 빨리 꽃을 보여줬다. 하얗고 동그란 컵 모양이 성스럽고 순결했다. 다른 장미들도 모두 깨어났다. 땅장미 3 총사는 모두 다른 색이다. 흰색, 분홍색, 보라색이다. 보라색 장미는 진한 핑크색이 연한 보라색으로 옅어지는 형식인데, 빈티지한 색감을 가졌으며 꽃이 커서 사진으로 찍으면 제일 멋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물 한잔과 핸드폰을 들고 정원에 나가 장미 사진을 찍는 게 몇 주간 일상이 되었다.
5월보다 조금 늦게 붉은 장미도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줄기부터 검은색이 돌더니 붉은 꽃이 폈다. 꽃이 매우 크고 색이 또렷한 빨강이었다. 처음 약했던 모습은 온 데 간데없고 옮긴 후로는 수세가 정말 강하다. 굵은 줄기가 쭉 뻗어 나왔다. 계속 줄기를 아치에 묶어줘야 했다. 화분에 심었는데 화분 밑구멍으로 땅바닥으로 깊게 뿌리를 내렸다. 강한 빛을 온몸으로 빨아들이고 기다렸다는 듯이 무서운 성장을 보여줬다. 병충해도 없고 꽃도 계속 피우는 정말 강한 장미였다.
새로 옮긴 자리에서 행복하게 꽃을 피우는 장미들로 마음 가득 행복한 한 달이었다. 핸드폰 사진첩은 꽃 사진으로 가득 찼다. 평일에는 우리 집 장미를 보고 기뻤고, 주말에는 마을의 다른 이웃들의 정원에 피어난 장미를 보러 산책을 다녔다. 색도 다양하고 모양도 다양한 장미가 우수수 피어난 5월 안에서 살아가는 게 행복했다. 정원에 다양한 꽃이 있지만 그래도 꽃의 여왕은 장미라 불릴만 했다. 그래서 유튜브 속 가드너들은 하나같이 다양한 장미를 키우고, 장미가 있는 집에는 크레파스 색깔 모으듯 다양한 색의 장미가 있나 보다. 빛이 매우 중요한 식물이라는 것을 간과하여 고생을 했지만, 과감한 봄날의 옮겨 심기로 5종류 장미의 꽃을 볼 수 있었다. 자리만 잘 잡아줬늘 뿐인데 요령없는 초보 가드너에게도 예쁜 꽃을 선물해줬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미모로 5월을 밝혀주는 장미는 나의 정원을 완성시켜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