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드 여름여행 #2
우리가 홋카이도로 여행 오기 이틀 전에 홋카이도 부근 러시아 캄차카반도에서 진도 8.8의 큰 지진이 있었다. 지진의 영향으로 쓰나미가 일어났고, 현재 일본 대부분 해안에 쓰나미 경보가 내려졌다. 주민들이 대피하는 지역도 있었다. 우리가 오늘 여행 갈 하코다테 지역도 그렇다. 삿포로는 내륙이기에 쓰나미 걱정은 잠시 잊고 즐거웠는데, 오늘 해안인 하코다테로 넘어가려는 걱정이 살짝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렌터카 여행이다. 아침에 늑장을 부려서 호텔에서 20분 늦게 출발했지만 그래도 길을 안 헷갈리고 렌터카를 받을 수 있었다. 직전 여행에서 호주 렌트를 받을 때는 좀 설렁설렁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일본 렌트는 설명이 꼼꼼하고 안내 종이를 다섯 장이나 줬다. 차를 인수할 때 흠집 체크를 철저하게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타게 될 차는 처음 봤지만 익숙한 느낌의 야리스라는 콤팩트 카를 받았다.
바로 삿포로 시내로 나왔는데, 아빠가 네비 설정을 알아서 고치고 좌측 운전도 잘한다.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첫 번째 목적지는 호수 전망대이다. 원래 오타루를 갔다가 하코다테에 가는 일정인데,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서 오타루를 생략하고 바로 하코다테로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아침과 간식거리를 샀다. 아들과 아빠는 삼각김밥, 엄마는 멜론빵으로 아침을 먹었다. 유명한 편의점 크림빵도 먹고 커피도 마시니 만족스러운 아침밥이 되었다. 우리나라 편의점과 비슷하지만 디저트나 빵이 좀 더 다양한 것 같았다. 느끼함과 고소함 사이를 잘 잡은 크림빵에 쌉쌀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은 어느 카페 못지 않은 환상의 궁합이었다.
남쪽을 향해 한참 달렸다. 이제 삿포로를 완전히 벗어나서 풍경이 산과 들로 바뀌었다. 산의 풍경이 한국에서 보는 산이랑 흡사해서 신기했다. 그리고 눈이 쌓였을 때 차선을 표시해 준다던 화살표도 많이 보였다. 국도를 한 시간 달려 전망대에 도착했다. 분화구 도야호를 바라보는 휴게소 겸 전망대이다. 한국 관광버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화장실에 갔다가 보니 매점에 한국 관광객과 가이드로 북적거렸다. 아이스크림과 요거트를 샀는데, 요거트는 한정 판매 목장 요거트였다. 요거트 맛이 과연 어제 밀크아이스크림처럼 깊고 고소한 맛이 나서 정말 맛있었다. 멜론, 우유, 옥수수, 회까지 앞으로 홋카이도에 먹어야 할 게 줄을 섰다.
점심을 먹으러 근처에 식당을 찾았다. 바닷가 마을의 작은 식당이었다. 가정집만 있고 식당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분위기 여서 반신반의 하고 가게에 들어갔다. 싹싹한 일본 아주머니께서 바 자리로 안내를 해 주셨다. 오늘의 메뉴를 보여주셨는데, 오늘도 매일 먹기로 결심한 카이센동을 시켰다. 일본인 로컬 손님이 밀려서 많이 늦게 나왔지만 그래도 오늘도 신선한 회를 먹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에게 일식은 항상 기본 이상의 타율을 자랑하고 있다.
또다시 하코다테를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들이 앞자리에 타고 나는 뒷자리에 타고 갔다. 식곤증 때문인지 얼마 안 돼서 잠에 들었다. 아들은 아빠랑 노래 맞추기 게임 같은 것을 하는듯했다. 잠에서 깨니 하코다테가 4킬로미터 밖에 안 남았다. 바로 하코다테의 성당을 향해 갔다. 성당을 보다가 아들이 속이 안 좋다고 하여 성당 바로 앞에 카페에 가서 아들은 볼일을 봤다. 우연의 일치지만 내가 가고 싶은 느낌의 아기자기한 카페였다. 할머니가 느릿느릿 움직이며 일을 보시고 나무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카페였다. 커피와 말차 아포가토를 먹었다. 나는 말차를 좋아하는데 일본인들도 말차를 좋아하는지 말차맛이 여기저기 많아서 행복했다. 크림을 느끼하지 않게 해주는 게 말차의 매력인데 일본인들도 그걸 아는 걸까 일본인과 나는 음식 궁합이 참 잘 맞는다.
근대거리를 걸어서 길과 건물을 구경했다. 사실 오늘 가려다 못 간 오타루의 풍경을 여기서 보는 것 같다. 잘 보존된 근대 고택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나라 군산, 목포에서 보던 건물과 비슷하기도 했다. 또 하코다테는 내리막길 끝에 멀리 바다가 보이는 그런 풍경의 길이 종종 나오는데 이 도시만의 특성인 듯했다. 그런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하코다테 야경은 일본 전역에서 3대 야경으로 유명한데 그 유명세에 사람이 워낙 많다고 해서 전망대는 가지 않았다.
사실 우리 가족은 먹는 것을 좋아해서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관광지가 아니라 마트였다. 미리 찾아놓은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오늘 갈 숙소는 부엌이 있는 곳이라서 특별히 장을 봤다. 나름 절제해서 샀다고 생각했는데도 많이 샀다. 한국에서 미리 장바구니를 가져왔는데, 제일 넉넉한 크기로 챙겼다. 챙기면서도 이 장바구니를 다 채우진 못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바구니가 꽉 차버렸다. 멜론하고 물은 따로 들어야 했다.
숙소는 호텔사이트에서 구했지만, 에어비앤비 같은 숙소였다. 독채 건물이라서 집 같은 매력이 있었다. 가자마자 아들은 씻고 나와 남편은 바로 저녁을 준비했다. 메인 메뉴는 소 혀와 등심 구이였다. 거기에 초밥과 소라찜, 가리비 구이, 밥과 미소 된장국과 명란젓이다. 멜론과 옥수수도 샀는데 이건 상에 올리지도 못했다. 하나씩 먹어보니 '일본의 맛집은 마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료들이 신선해서 맛있었다.
나는 특히 옥수수가 기억에 남는다. 어제 오도리 공원에서 구운 옥수수가 참 맛있어서 오늘도 마트에서 삶은 옥수수를 보자마자 9개나 샀다. 저녁을 그렇게 배부르게 먹고도 큰 옥수수 3개를 다 먹었다. 우리 나라 옥수수는 껍질도 두껍고 단맛이 없을 때가 많은데, 홋카이도 옥수수는 껍질은 얇고 속이 부드럽고 달아서 꼭 설탕물 같다. 이런 단순한 맛인데 어찌나 맛있던 지 한번 잡으면 눈에 보이는 옥수수가 다 사라져야 끝이 난다. 평소 그렇게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는데, 홋카이도 옥수수는 사랑에 빠질 맛이었다. 한국 돌아가면 홋카이도 옥수수가 많이 생각날 것 같다.
숙소는 작지만 섬세한 관리가 느껴졌다. 주방 용품과 수납이 센스가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살까 고민했던 수납용품들이 구석구석 보였다. 씻을 때도 좋았다. 샤워실, 화장실, 양치실이 모두 공간 분리가 되었다. 그리고 물이 콸콸 나오는데 앉아서 씻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숙소는 취소할까 고민했던 숙소였다. 이 숙소는 작은 독채 건물에다가 바닷가에 있어서 쓰나미가 덮치면 위험한 조건을 다 갖췄다. 그래서 나름 목숨 걸고 온 여행이라고 볼 수 있다.
여행 오기 전에는 이런 걱정이 있었는데, 웬일인지 홋카이도에 온 이후에는 그런 걱정을 할 새가 없었다. 새로운 풍경과 경험을 하느라 바빠서 이런 생각은 뒤로 밀리고 밀려서 우리는 하코다테까지 와버린 것이다. 하코다테 숙소에서 잠들기 전에도 밤에 쓰나미가 와서 이 집이 통째로 떠내려가서 모두 죽거나 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휴전 중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일 평화로운 하루를 살아가듯 하코다테라는 소도시의 하루도 평화롭게 지나가지 않았나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하코다테의 따뜻한 햇살은 평화롭게 세상을 내리쬐고 있었다. 나름의 태평주의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여기 사람들과 다 함께 행운을 맞은 셈 치기로 했다. 그리고 쓰나미에 대한 걱정으로 하코다테에 안 왔으면 많이 후회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