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신앙생활을 해 볼 작정으로 집 앞의 작은 교회를 방문했던 날이었다. 친절함이 몸에 베인 상냥한 목사 사모님의 안내를 받아 설교를 듣기 위해 예배당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생각하는 교회는 지혜의 말씀이 충만한 곳으로 생각되었기에 설교를 꼼꼼히 듣고 싶었다. 그러나 설교 끝 무렵에 들어간 탓에 제대로 교감을 할 수가 없었다.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자 음악 밴드로 조명이 비춰졌다. 제법 규모가 있는 음악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고 음악프로를 연상시키는 음향 장치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겉보기에 작고 아담한 소박한 모습의 교회를 예상했는데 갑자기 화려한 무대가 준비된 대형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홀린 듯 흥겨운 연주를 듣고 있으니 찜찜함이 사라지려 할 순간 누군가 내 앞으로 헌금 바구니를 내밀었다.
아! 너무나 완벽한 타이밍에 나타난 헌금 바구니! 모든 순서가 지나치게 적절해서 치밀한 계산으로 다가왔다.
헌금을 내고 아이들과 함께 1층에 내려오니 처음 교회에 온 친구들이라며 한 분이 아이들에게 과자를 건네주며 환한 웃음으로 대해주셨다.
“오늘 교회에 와보니 좋아요?”라는 질문에 아이는 느닷없이 “저는 부처님이 더 좋아요” 라고 대답해서 그 분을 당황스럽게 하였고 굳어진 얼굴 위에 방금 전의 미소는 사라져버렸다. 교회에서 금지어를 말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황급히 죄송해요 라는 말을 뒤로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놀이터로 갔다. 멀리 보이는 십자가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교회 안에서 멀리 느껴졌던 하나님은 교회를 벗어나니 너그러운 하나님으로 모습으로 아이스크림과 함께 달콤하게 나타났다.
교회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또 한 번 강렬하게 찾아왔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직전의 겨울 일요일 점심 무렵에 여의도의 대형교회 앞을 지나쳤다. 유행하는 명품패딩과 명품 가방을 든 단정한 옷차림을 한 수 많은 인파가 초현대식 대형교회에서 쏟아져 나왔다. 아침부터 늦잠을 물리치고 단정하고 예의바른 옷매무새를 갖춰 입은 그들의 성실한 모습이 빛나 보이면서도 화려한 차림새가 내게는 종교적인 검소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집 앞의 동네 교회를 놔두고 유명한 대형교회에 사람들은 왜 모이는 것일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인파를 보며 인당 만원이라는 헌금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와우...오전 영업은 수지 맞는 장사가 아닐까?
주식회사 ***교회라고 해야 옳지 않은가?'
교회를 다니는 모태신앙의 친한 동생에게 나의 '불온한’ 생각을 이야기했다. 만약 내가 교회를 다니게 되면 헌금과 십일조를 내야 하는데 내가 바치는 헌금이 목사님 자녀의 해외유학비가 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나를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너무 신기해”
“언니~ 사람을 보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어봐.”
좋은 말씀은 새겨듣고 싶고 깊은 감동을 주며 내 마음에 변화의 씨앗을 뿌린다.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좋은 말씀을 나눠주는 주변 지인들을 보며 종교를 갖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하나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카톨릭, 불교 등 종교의 모습에서 세속의 경제논리가 읽혀질 때면 종교와 나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간다.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종교생활에 느꼈던 것은 단편적이고 겉핥기의 편향된 모습이지만 내 안의 엄격한 잣대와 거부감을 뚫고 하나의 종교에 정착하기는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당분간은 책을 통하여 차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진리를 얻고 깨달음의 말씀을 구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