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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Gang Jan 19. 2020

첫째가 태어나다.

사실 박사과정을 할 때 출산을 하는 걸 추천하는 편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 자체가 많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설고 낯선 환경과 병원시스템에 과정 자체도 엄청 스트레스받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박사과정을 진행하는 나이 즈음이 되면 아이가 태어나는 시기와 겹치기에 어떤 의미로는 피할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교수님은 아이가 태어나면 졸업이 1년 늦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는데, 실제로 출산을 할 경우 교수의 정년심사기간(Tenure clock)을 늦혀 주는 경우도 있으니 만만한 일은 당연히 아니다.  


나의 경우는 결혼 하고 이년이 지나 유학을 나왔기에 아이에 대한 생각을 미리 하고는 있었지만, 딱히 계획을 두지는 않았다. 뭐 생기면 낳고 아니면 말고, 이런 정도였지 뭔가 의무적으로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하루하루 적응을 하고 있던 2010년 봄 와이프가 꿈에서 화염이 엄청난 불 꿈과 똥꿈을 한 번에 꾸었다며 신기해했다. 화염이 보이는 불 꿈도 좋은데 똥꿈이라니 이건 대박! 이러면서 우리 둘은 메가밀리언(로또)을 사러 월마트로 향했다. 이제는 좀 더 편안하게 살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면서.. 메가밀리언은 일주일에 두번씩 결과가 나오는데 아마 5불어치 (5 게임, 현재는 2불씩)를 한 것 같은데 하나도 숫자가 맞는 게 없어, 아니 어떻게 숫자가 하나도 안 맞냐며 웃고 넘기고 얼마 후 뭔가 몸이 이상하다면서, 테스트 기를 사 오라고 해서 집 앞 RideAid에서 두 개인가 테스트기를 사서 가져다줬더니. "아 아닌가?" 한다. 그러던 다음날 아닌가 해서 화장실 한쪽에 치워놨던 걸 가져오면서 "이거 보여?" 하며 정말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희미한 두 번째 줄이 나온 게 아닌가. 두둥 임신. 


1년 차도 아직 안 끝났는데 임신이라니, 걱정도 약간은 있었지만 일단은 기쁜 마음이 컸다. 앞으로 다가올 날을 예상치 못한 채. 


두 줄을 선명하게 확인하고 나서 그때부터 부랴부랴 병원을 찾아 나선다. 계획이 없었기에 미리 산부인과를 염두에 두지 못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한 병원을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도 거기 3명의 산부인과 의사 중에 한국계 미국인 분이 계셔서 한국어가 가능한 그분을 의사로 정한다. 어쩜 그리 중간중간 체크업이 많던지 학교를 다니면서 병원 예약과 방문을 항상 함께 했던 것 같다. 또 미국의 경우 각 장비가 다른 병원에 위치하는 경우가 있어 가끔은 예약을 하고 Albany까지 가서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기도 하였다. (미국은 참 이것이 갑갑하다). Troy/Albany의 경우에는 Albany Medical School의 중형급 병원이 있어서 문진은 각 오피스에서 하고, 실제 출산은 그 병원에서 하게 된다고 하였다.  


불똥 꿈을 꾸고 임신했다고 태명이 불똥이었다. 첫 딸이 아빠를 도와주는 건지, 봄에 임신임을 알게 되었는데 입덧이 한참 심할 때는 첫 번째 여름 방학이어서 방학 때 옆에서 도와줄 수 있었다. 와이프는 임신을 해서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는데, 이게 굉장히 고통스러운 게 안 그래도 미국에서는 한식이나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데, 도통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은 수박을 엄청 먹었고, 참다 참다 못해 베트남 쌀 국숫집(알바니에 Van's라는 베트남 음식점이 있는데 내 평생에 최고의 쌀 국숫집이었다 강추!)을 갔는데 다시 한번 화장실을 다녀오더니만 지금 현재까지도 실란초 향을 맡지 못한다. 밤에 공부를 하다가 라면을 끓여 먹으면 그 냄새도 싫어했으니, 나로서는 그 고통을 알 수는 없지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다행히 12월 초가 예정일이라고 하니, 대략 마지막 시험을 치는 주와 겹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감에 빠졌다. 늦은 여름이 되자 입덧은 안정이 되기 시작했고, 이제 애기가 생기면 제대로 여행을 못 갈 것 같아서, 그동안 입덧에 힘들어하기도 했고 해서 몬트리올, 퀘벡 여행을 가기로 한다. 몬트리올은 차로 3시간 북쪽으로 달리면 나오기에 운전에 부담도 없었고 가는 길 날씨도 좋았다. 별 준비를 못하고 그냥 무작정 출발하였는데, 같은 북미 대륙이지만 캐나다는 또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아울러 퀘벡주는 불어를 주로 쓰고 있어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몬트리올에서 맥길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이셨던 이경영 교수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그러면서 또 맥길 대학 구경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박사과정이었던 아주 유명했던 연예인의 동생 분과도 인사를 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박사과정의 삶은 다 비슷하다), 지금은 연락이 안 되지만 어디서든 잘 계실 것 같다. 이경영 교수님은 그때 학교 여기저기를 보여주시기도 하였고 몬트리올의 정보도 주셨다. 지금도 굉장히 온라인으로 친하게 지내는데 시간이 흘러 학위과정을 마칠 때 즈음 지나가다가 알바니에서 만나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몬트리올은 날씨가 좋았어서 그랬던지 참 느낌이 좋았고, 사실 일단 시골에 살다 보면 도시의 편리함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한식당도 있고, 닥친 김에 퀘벡까지 가보기로 한다. 퀘벡은 말 만들었지 가보질 못했는데 아주 아름다운 건축물로 가득해서 여성 분들이 참 좋아하는 도시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여행지가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고 해서 아마 좋은 기운을 많이 주었던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한참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때, 일 년 동안 살았던 그 집과의 계약이 끝났다. 그 집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길가에 있어서 차량 소리가 심했고, 공간도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난방비 걱정에 (겨울이 길고 신생아가 나오니) 집을 찾다가 학교에서 제공하는 Family housing에 들어가기로 한다. 지금은 학부생 기숙사로 바뀌었는데, 오래되긴 했지만, 일단 가격 대비 집이 컸고, 유틸리티가 포함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세탁실이 별도로 있고 많은 불편한 점도 있었다. 다만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집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노을이 기가 막힌 곳이긴 했다. 또한 학교 운동장이랑 붙어 있어서 나중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산책 다니기 참 좋았고, 답답할 때는 트랙을 돌며 안전하게 운동할 수도 있었다. 물론, 난방비 걱정이 없어 신생아를 데리고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유학생이 이삿짐센터를 구할 수 있을까? 그동안 친했던 모든 지인들이 총동원되어 먼지를 덮어쓰며 내 일인 듯 도와주었다. 이런 도움이 항상 감사하다. (나중에 이사를 한번 더 한다. 학교에서 이사를 해주긴 했지만)


지금은 학부생 기숙사가 된 Family housing

넓은 뒷 뜰이 속이 뻥 뚫렸던

나중에는 아이방/옷방으로 썼던

화장실도 제법 넓어졌다.

내 공부방도 생겼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를 둘러 업고 논문을 읽었던.

언덕이 내려보였던 안방

저녁에는 노을을 볼 수 있었던

학교 운동장을 끼고 있어 시야가 좋았다


그렇게 이사까지 하고 나자, 가을은 찾아오고 그 와중에 나는 퀄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불러오는 와이프의 배를 보며 본격적 2년 차를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슬슬 출산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별 생각이 없다가 와이프가 찾아보고 필요한 품목이라며 뽑아온 리스트가 어마어마하여 다시 한번 놀랐고, 그것을 하나하나 준비하다 보니 이제 정말 아빠가 되는 듯싶다. 나이가 나이었던 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생비자를 받을 때 장모님도 함께 대사관 인터뷰를 봐서 미국 비자를 받게 되었는데 이건 혹시나 출산을 하게 되면 오셔서 6개월까지 체류를 하시며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전자비자는 90일까지 체류가 가능한데 혹시나 해서 미리 받아 놓았음) 


출산일이 다가오자 장모님도 뉴욕공항을 통해 오시고,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산부인과에서는 출산 직전이 되면 출산에 관련된 클리닉을 들으라고 추천을 하는데, 아이가 태어남을 겪어본 적이 없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시간 정도 출산과정과 혹시나 일어나게 될 일들 그리고 준비할 것들을 친절히 설명해 주고 라마즈 호흡법 (사실 과정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아니 그럴 정신이 없었다)도 가르쳐 주었다. 실질적으로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일단 대략 출산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다.  


늦은 가을, 수업으로 정신없었지만 시간이 되면 근처 공원을 찾아 나섰다. 그냥 아이에게 좋은 공기와 좋은 기운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기에 Troy는 너무 좋은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산과 공원들이 많아서, 



12월 초 나는 박사과정 3학기 마무리로 텀페이퍼에 숙제에 쌓여있으면서도 예정일이 가까워 온 관계로 온통 전화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이 나오면 사진을 찍어주자 싶어서 이때 처음으로 아이폰을 중고로 두대 구입하였다 (그렇다 아주 빠듯한 살림이었다). 그때 즈음, 그 힘든 이사도 내 일처럼 열심히 도와주었던 동기들, 베이비 샤워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나올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마냥 기다려 보자하고 예정일이 5일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까지 다 싸놓고 신호가 오면 바로 차를 몰고 20여분을 달려 병원으로 가는 시뮬레이션까지 마쳤던 우리는 예정일 날 부터 하루하루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전혀 소식이 없었다. 나도 미리 교수님들께 상황을 설명하고 집에서 텀페이퍼를 쓰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염없이 추운 겨울날 학교 실내체육관을 돌며 (이 실내체육관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지 몰랐다. 집에서 3분 거리) 운동을 하면서 기다리다가 결국 의사선생님은 유도분만을 하자며 날자를 잡아주신다. 


실내 체육관 돌기 추운 Upstate NY에서 이런 시설이 있어 도움이 된다.


그렇게 12월 17일 일찍 그동안의 시뮬레이션과 연습이 무색하게 우리는 멀쩡하게 병원으로 가방을 싸서 향한다. 이때부터 나는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영어가 편하지 않은데 혹시나 큰일이 생기면 어떻게 알아들을까 노심초사하며 온갖 신경을 최대한 곤두세우고 병실로 들어간다. 이곳의 경우는 아예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만 출산 병동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들어가니 1인실을 배정해 준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우리는 에피를 맞을 거냐고 물어보는 간호사에게 일단은 버텨 보겠다고 하고 담당 의사 선생님이 양수를 터뜨리자 그때부터 진통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아팠을까. 함께 있지만 간호사가 들어올 때마다 나는 긴장을 하고 괜찮은지 별 문제는 없는지 물어본다. 다행히 간호사들은 나의 못난 영어실력에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천천히 잘 설명을 해주신다. 그러다 에피를 맞고 잠시 정신줄을 놓더니 간호사가 들어와서 진행사항을 보더니 갑자기 난리를 치기 시작한다. 아이가 나온다... 


잠시 후 의사 선생님과 학생 의사(미리 와서 동의를 구한다)가 같이 들어와서 출산이 시작된다. 나는 그냥 옆에 혼이 반쯤 나간채로 서 있는다. 그렇게 아침 8시에 들어가서 오후 6시 30분에 아이가 태어났다. 예정일을 한참이나 지난 덕분에 정말 큰 아이가 태어났다. 4kg가 넘는...미국에 온 지 1년 반 만의 일이다. 출산 후 하루 있다가 퇴원을 하였다. 우리가 집에 도착하고 다음날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나의 차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하루만 늦었어도 아마 앰블런스를 불러야 했을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는 건 너무나 기쁘고 소중한 일이나 나는 가수다! 가 아니고 박사과정이다. 이제 2년 차도 안되었다. 다행히 나의 딸은 아빠가 박사과정인지 알았던지 입덧을 여름방학으로, 예정일이 한참 지나 내가 모든 텀페이퍼를 제출하고 난 다음에 태어났다. 바로 저렇게 무시무시한 눈이 내리기 직전에 퇴원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때부터 신생아와의 실랑이가 시작되는데 초보 엄마 아빠에게는 모든 게 조심스럽다. 경영학의 경우에는 대부분 AOM(Academy of Management)라는 학회를 참여하는데 이 학회의 deadline이 1월이다. 12월 17일 아이가 태어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동안 준비했던 논문 마무리에 나는 눈이 벌게지기 시작한다. 2시간마다 깨어나는 아이를 번갈아 둘러매고 논문을 읽고 겨우겨우 deadline을 맞추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써서 제출한 그 논문이 Accept 되었다는 소식을 겨울이 지나고 봄에 듣게 된다. 


이제 공부, 미국 적응에 육아까지 더해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많은 분들이 궁금하실 지도교수를 선정하다 를 써보도록 하겠다.


출처: https://07701.tistory.com/127 [강박의 2 c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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