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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벋으훈 Jan 03. 2021

곱씹고 싶은 말(2020.9~12)


텍스트가 글 안에서만 소비되는 세상이다. 글 너머의 것들을 사유하고,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달리 해석할 여유가 마땅치 않은 현재다. 적어도 나를 둘러싼 시간은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직설적이지 않은 글자들이 나열된 '시'는 현학적이고 고루하게 여겨진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종종 일부러라도 시를 찾는다. 시를 즐긴다 말할 만큼 볼 줄은 모르지만 읽으려 애쓴다. 몰입과 감상을 통제하려는 듯 냅다 떠먹여주는 콘텐츠의 향연에서 시는 독립적인 영역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런 시를 대체할 콘텐츠를 아직 찾지 못했다. (다큐멘터리가 엇비슷하다고 생각)


시를 읽다가 가끔 어떤 촉수가 뇌에 꽂히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와 연결되는 순간이다. 물론 나만의 착각일 가능성도 높다. 올해 읽은 시 중엔 총 세 편이 그러했다. 강성은 <기일 忌日>, 박준 <우리들의 천국>, 나희덕 <혈거인간>. 하지만 여전히 18년에 읽은 허연 <내가 원하는 천사>만큼 교감이 뚜렷한 시는 없었다.


내가 모은 말과 글도 그 생산자와 교감했다 느껴 기록해둔 것이다. 나는 전달자로서 이를 모아 퍼뜨린다. '시'처럼 계속해서 곱씹고 싶은 말을 틈틈이 적어놓았다. 누군가 이를 보고 나 혹은 작가와 연결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공유한다.


나희덕 <혈거인간>  /  강성은 <기일 忌日>



관계와 감정



드라마 <밀회>에서 이선재(유아인)와 오혜원(김희애)의 말

혜원 : 내가 왜 니 선생이니?

선재 : 왜냐면요. 제가 선생님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정해졌어요.



내가 아끼는 사람의 말

우리집 폐장했는데 님이면 오케이야



공감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의 말

제가 지금 당장은 돈을 안 받아도 좋다고 생각을 했던 것은 집으로 돌아가면 현재 계획하고 있는 작업들, 사유들이 끊기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에요. 비록 3~4달 짧은 기간이지만 그 기간 동안 집 관련해서는 걱정 안 하고 살았으면 좋겠단 거였습니다.



JTBC 드라마 <경우의 수>에서 경우연(신예은)이 이수(옹성우)에게 한 말

"생일 케이크 왜 반으로 가르는 줄 아냐. 지금까지 살아온 날과 앞으로 살아갈 날을 반으로 가르는 거다. 안 좋은 일들을 살아온 날로 미루고 싹둑 잘라버리라고."



<괜찮아, 도와줄게, 같이 해보자> 한겨레에 칼럼으로 실은 이승욱 정신분석학자 의 말

외로움으로 인한 상처는 말 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도 말 걸어지는 대상이 아니라는 데서 발생한다.



『오만과 편견』의 말 (책을 직접 읽은 게 아니라 누구의 말인지 모른다..)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한다.



현 시점 최애 장편소설 『지구에서 한아뿐』 내 한아의 말

"자유로워 보이는 관계라도, 그 안에는 어떤 안정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냐?"



에세이 《난치의 상상력》에서 저자 안희제의 말

어디서나 소속감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나를 명시적으로 배제한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디서나 나는 적잖이 '이물질'이었다. '이물질'은 소속감의 부재 내지는 혼란을 겪는 사람이다. (중략) 무소속은 실패이며, 얼른 끝내야 할 무엇으로 여겨진다.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한 이행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꼭 정착하도록 하기보다는, 정착할 수도 있지만 정착하지 않아도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꼭 어떤 일자리를 갖지 않아도, 꼭 어떤 정체성을 갖지 않아도 흐르고 치이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소속되지 않아도 되는 삶, 살 만한 경계를 상상해본다.(68-70)



한국일보 칼럼 <사유리가 던진 메시지..인구변화발 피할 수 없는 가족의 재구성> 중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말

건강한 가족은 외형이 아닌 실체에 있다. 친밀함, 응집성으로 가족의 기능이 발휘되면 어떤 식이든 가족이다.



어떤 최종 합격자의 조언 비슷한 말

(면접에서는) 같이 일하면 골치 아플 것 같은 사람처럼 보이면 안 되고 일단 대화 나누기 편한 사람으로 여겨져야 돼






저항과 연대



윤이형 소설 『붕대감기』 에 나온 청소년 활동가의 말

"친구보다는 동료라는 말이 더 좋아요"



에세이 《난치의 상상력》에서 저자 안희제의 말

'정치적 올바름'이란 어떤 단어의 의미를 한정하지 않고 계속 질문하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홍대병'이라는 단어는 문제인가? 그것은 왜 문제인가? 이를 알아보려면 이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살펴야 하고, 사용되면 안 된다는 이유를 "00병이기 때문"만으론 일축해서는 안 된다. (107-108)



프랑스 작가 '라로슈푸코'의 말

화를 내지 않는 관대함은 사실 허영심과 태만함과 공포심에서 온다.



인문학 서적 《정신적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에서 가타다 다마미 정신과 의사의 말

 현대 사회는 모두 각자의 가치관을 지녔다는 의미에서 다양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개인이 다양한 가치관을 이해하거나 타인의 가치관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사회적으로는 가치관의 다양화가 이뤄지는데 개인은 오히려 가치관이 획일화되어 타인의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와 세계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그 이상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사회학자 오찬호의 말

'코로나 바이러스는 기저질환이 있는 60대 이상들에게 상당히 위험하다'는 분명하고도 끔직한 사실이 건강한 개인들 일부에겐 별 무게감이 없다. 그러니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어떤 노인이 죽을 수도 있다고 해석하지 않고 '건강한 사람들끼리는 괜찮아'라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전문가들이 기대하는 수준으로 줄이지 않는다.



2020 프라이드 영화제 <아크로밧> GV에 참여한 허남웅 평론가의 말

빌딩이 높이 올라갈수록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비슷해지고, 소수자들은 곡예사 같은 아슬아슬한 삶을 살게 된다.



간디의 말

비폭력 저항은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을 때에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한겨레 칼럼 <괜찮아, 도와줄게, 같이 해보자> 중 이승욱 정신분석학자 의 말

세상의 모든 험한 곳, 그 밑자리에는 여성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밑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장애인 밑에 여성 장애인이, 성소수자 밑에 여성 성소수자가 있다.



헬렌켈러의 말

내 활동이 사회봉사나 시각장애에 국한될 때, 그들은 나를 현대의 기적이라 과장되게 추켜세웠다. 그러나 내가 정치적인 현안을 이야기 시작하면 그들의 어조는 완전히 달라진다. 내가 부도덕한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라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호의를 구걸하고 싶지 않다. 나는 공정함을 원할 따름이다.



당선 소감을 밝히는 카멀라 해리스의 말

"while I may be the first, I won't be the last"






한국과 정치


<디지털교도소> 소개말

대한민국 악성범죄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에 한계를 느끼고 이들의 신상정보를 직접 공개하여 사회적 심판을 받게하려 한다.



진중권의 말

민주당부터 당의 혁신이 불가능하게 다 장악되어 있고 이런 권위주의가 팬덤정치와 착종돼있으니 자정되기란 어렵다고 본다.






미디어와 저널리즘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은유들》 의 <의례로서의 커뮤니케이션> 중, 이희은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부교수의 말

 의례는 기본적으로 반복된 훈련을 통해 공동의 가치를 숭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신체에 습관적이고 관습적인 사고로 주입된다.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는 우리가 할 일은 그러한 훈련된 의례가 유지되거나 붕괴되는 현장을 정확히 관찰하고 해석하는 일일 것이다.



미디어오늘 <조선일보 박지선 보도를 지켜보며>의 말

더욱이 언론의 자유라는 가치는 윤리를 동반했을 때 힘을 갖는 것이지 무한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디어 수용자가 적극 지적하는 시대다.



사회과학 서적 《저널리즘 모포시스》의 저자 임종수 미디어학자의 말

기자는 항상 어떤 뉴스 소비자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더 깊이 생각하며, 더 비판적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개인은 언제든 정보와 지식에 접근할 수 있고,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언론이 그리고 포털이 여전히 집착하는 지엽적 사실보도는 자극적 클릭을 유도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일에 직업적 차별성을 부여하지는 못한다.



사회과학 서적 《팩트풀니스》 <9장. 비난 본능>에서 저자 한스 로슬링의 말

악마를 찾지 말고 원인을 찾아라






기획과 창작



최장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엘레멘트 컴퍼니 대표의 말

기획자에게 필요한 태도 중 하나는 이거다. 'Enough is not enough.' 마감 직전까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피카소의 말

라파엘로처럼 그리기까지 4년이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It took me four years to paint like Raphael, but a lifetime to paint like a child.



유튜브 채널 <시즌비시즌>에 출연한 유세윤의 말

댓글에 뭐가 달려야 대박나는지 알아요? '그런데 이거 왜 하시는 거예요?' 이게 달려야 대박 나는 거예요.



유튜브 채널<달라스튜디오> 중 <발명왕> 내 금지어

왜, 아니, 굳이



EBS PD의 말

보고 들은 것에 대한 느낌과 자취를 어떤 방식으로든 남기길 바랍니다.





의지와 낙관


나의 최애 장편소설 『지구에서 한아뿐』 서술자의 말

언젠가 자기 브랜드를 갖게 될 거라고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한아는 기대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배신한 셈이지만, 그 조그만 가게에서 매우 행복하게 일했다. (12)



가이스탠딩 《기본 소득》에 있던 영국 경제학자 '바버라 우튼'의 말

진화는 가능한 것의 노예가 아니라 불가능한 것의 대변자로부터 그 창조적 힘을 가져온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 중 前 구글 디자인 윤리학자 트리스탄 해리스의 말

Director : Do you think we can gonna get there?

Harris     : We have to



KBS <다큐인사이트> 7월 30일 이영광 기자에 대해 언급하는 변상욱 YTN 앵커의 말

벌새의 느낌이에요 역학적으로, 신체 구조상으로나 벌새는 날기가 어려운 구조거든요. 짧고 작은 날개에, 뭉툭한 몸집에 꼬리도 제대로 갖춰있지 않고. 그런데 난단 말이죠. 벌새는 그 생각이 없어요. 유체역학이나 신체 구조상의 개념 자체가 없어요. 그냥 날아버려요. 영광 씨도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죠.





나와 나  I and me


2021년을 준비하며 나눈 대화에서 나도 모르게 나왔던 내 속의 말


- 내 친절의 9할은 가식이야


- 정제해서 말하려는 노력이 허례허식이라 생각했었어. 근데 요즘은 그게 기분이 말이나 행동을 잡아먹지 않게 만들려는 최소한의 장치같기도 하고...


- 누군가에게 의존하려는 마음은 억눌러서 나쁠 것 없겠지만 함께 살아가며 사회를 구성한다는 감각은 계속 꺼내놓는 게 좋을걸?





끝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다른 생들을 애달프게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시선에서만 허연 시의 화자는 천사를 상상한다. 천사는 우리가 상상하는 천사를 가장 닮지 않은 모습으로 올 것이라는 그 안타까운 상상이, 어쩐지 위로가 된다. 허연은 완벽한 희망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천국은 없다고 말하지만, 그 실망과 절망이라는 희망의 흠집을 통해서 희망을 기억하고 증언해줄 자들은 있다고 기대한다."


허연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 (2012)소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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