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하는 사람에서 질문하는 사람으로
예술대학원에 붙었다. 생각만 하고 해오지 않았던 것들, 부수적으로는 실천하지만 나의 주요 업무로 택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것들을 해보고자 한다. 아직은 무턱대고 발산하기만 하는 감정, 어설프게 꿰어맞추게 되는 서사 등을 보기 좋게 다듬는 작업을 해볼 수 있겠단 기대감이 드는 한편 두려움도 작지 않다. 2년 후를 걱정하는 건 '벌써' 등으로 수식되는 시기상조보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기반한다. 어느 정도의 수익성을 담보할 정도로 잘 해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 두려움은 유의미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노력으로 대체할 수도 있겠다.
대학생 때까지 제도의 정당성에 대한 고민보단 제도를 이용하는 방법만 익혀왔다. 사람들이 모두 일직선으로 나열될 수 있다 생각하며 그 선두에 서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렇게 외고에 진학하고 수능을 꾸역꾸역 다시 봐서 스카이에 갔다. 그래야만 성공한 삶 같았다. 그후엔 직업이었다. 방송 제작자가 돼서 발휘할 모종의 영향력에만 더 눈길을 쏟았다. 그렇게 '대답 잘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틀 안에서 나름 우수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몇 해 전, 그러니까 18년부터는 달라졌다. 일련의 경험을 거치며 대답보단 질문하는 나를 발견했다. 다르기보단 틀린 질문이 보였고 그것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는 분위기에 의문이 들었다. 당연한 게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익숙했던 타자화와 시혜적 태도에 거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상실이 잇따랐다. 친구들과 어우러져 깔깔대며 보던 콘텐츠가 불편해졌다. 그 불편함을 다루는 콘텐츠를 즐겨보게 됐다. 만나는 친구들이 달라졌다. 친구보단 동료들과의 약속이 잦아졌다. 동료이면서 친구인 사람들은 있었지만 동료가 아니면서 친구일 순 없었다. 쌍방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불편해 했다. 상실과 다른 쪽, 반대는 아니고 그저 방향이 다른 어딘가에선 연대가 있었다.
이미 그때부터 방송 제작자로선 부적격자였다. 방송에서도 제작이 끊임없이 이뤄지지만 그곳은 제도권 내에서 많은 사람들과 무리없이 소통해내는 작업을 추구했다. 새로움을 굳이 좇지 않아도 됐다. 내가 추구하는 균열은 입밖에 꺼내선 안 되고 화합과 조화를 우선시해야했다. 중립과 객관을 어설프게나마 요구당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그들에게 편입되기 위해선 나를 맞춰야 할 틀이 명확히 존재했다. 그 침대보다 내 몸이 커 발이 삐져 나오면 발은 잘라야 했고 키가 부족해 침대가 한참 남으면 다리를 억지로라도 늘려야 했다.
지난해, 답이 정해진 퍼즐판에 맞는 조각으로 나를 다듬어갔다. 바꿔말하면, 1년 동안 나를 잃어갔다. 갈등은 항상 피해야했고 논조는 부드러워야했으며 누군가에게 거부감을 야기해선 안 됐다. 용인된 이야기만을 허용 가능한 방식 내에서 다뤄야했다.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극복 서사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접근이 만연했다. '우리'보단 '그들'이어야 했다.
일단 제도권에 들어가서 뒤통수를 치자며 외면을 연습했다. 책장에서 '성(性)' 혹은 '젠더'가 들어간 책들을 시선이 안 닿는 구석으로 옮겼다. 의도적으로 어휘를 순화시켰고 일부 콘텐츠를 외면했다. 어느새 그 콘텐츠에서 말하는 주장과 그 주장에 담긴 삶까지 외면해나가는 듯했다. 섬뜩했다. 들어간 후에 질문을 잃고 보편적 삶이 주는 편안함에 취해있을 내 모습이 두려웠다. 책 위에 조금씩 먼지가 쌓일수록 시야도 나날이 좁아지는 것 같았다.
물론 돌고 돌아 방송의 일원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저 취업문만 바라보다 당도한 것과는 다를 것이다. 다르도록 만드는 것이 지금 내 선택에 따르는 책임이다. 방송국에 가더라도 보편적 생애주기를 벗어난 삶에 대한 고민을 내재화한 제작자로서 존재할 것이다. 잠깐의 타협과 굴복은 있겠으나 내면화된 문제 의식은 사라지지 않을 테다. 질문과 예민함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어디서든 지속하겠다는 다짐이 없다면 대학원을 가서 다큐멘터리를 배우겠단 선택을 할 수 없다.
부지런해야 한다. 결과보다 과정에 주목하는 시선은 가만히 있는다고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에는 결과만이 넘친다. 자칫하면 그 결과, 즉 사망자 수, 부상자 몇 명, 피해자 몇 명, 벌금 얼마, 자살률 몇 위 등에만 주목하기 십상이다. 불행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아야 그 결과로까지의 과정을 유의미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정에 담긴 삶과 그 속의 감정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꾸준히 기록해야 콘텐츠가 만들어진다. 그래야 제작이 아닌 새롭다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작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예민함은 행동의 원인보단 이와 같은 부지런함의 결과일 수 있겠다. 반응, 포착, 기록, 해석, 재현을 부지런하게 해나가다보면 비슷함 사이의 차이를 발견해내고 일상에 스며든 폭력을 찾아내는 예민함은 자연스레 뒤따라 올 테다. '부지런한 번역가'가 내가 생각하는 다큐멘터리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