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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nut Dec 22. 2019

1-1. 그렇게 힘들면 출가하는 게 어때요?

temple stay의 모든 것 :[양평]용문사


도망쳐야해.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괴로움, 늘 잘 되었던 것이 되지 않을 때의 자책감, 어느 순간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혀졌을 때의 두려움, 세상의 먼지가 되고 싶을 만큼 지친 삶 속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도망이었다.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 해야 했다.


그곳이 어디든,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면 좋겠고 다시 내 삶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면 더할 나위 없이 ok를 외쳤다. 그런 찰떡같은 타이밍에 눈에 띈 것은 '템플스테이'였다.


나는 서울 도심에 살고 있어, 산은커녕 흙을 밟아볼 기회가 적다. 과거 학교 운동장에서 밟아본 정도? 그만큼 나에게 산은 익숙한 곳이 아니다. 더욱이 절은 어떻겠는가? 종교는 엄마를 따라,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으로 암묵적인 기독교를 따랐고 절은 나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말라가는 삶 속에서 그런 이유들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저 당장 나에게 쉴 장소를 제공해주고, 사람들이 느껴본 힐링을 얻고 싶었을 뿐. 그렇게 무작정 '용문사'에 템플스테이를 예약했다.


뚜벅이라 얻은 소.확.행

교통편도 보지 않고 예약한 나에겐 너무나 긴 여정이었다. 뚜벅이로서 지하철과 버스 2시간은 도착하기도 전에 지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뚜벅이에게도 장점은 있었다. 우선 나의 메마른 공간을 벗어나 다른 지역을 간다는 자체가 설렜고 작지만 소소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하늘이 나에게 힐링을 주려고 작정을 했는지 몇 가지의 선물을 주기도 했다.


그 선물은 2시간의 긴 여정 사이,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양평의 인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하철 같은 칸에 있던 어르신께서 보리빵을 나눠주셨다. 단짠을 좋아하는 나에겐 밋밋한 빵이었지만 누군가 나에게 아무 이유 없이 무언가를 주는 자체가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추위에 메마른 땅에 햇빛을 비춰주는 느낌이랄까? 사실 이렇게 작은 나눔에 오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내 삶은 항상 누군가를 이겨야 보상을 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 빛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칼라로 그린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나만 흑백으로 그려진 것 같았다.

그런 흑백 처리된 나를 봐주다니!


지금은 그렇게까지 느꼈던 내가 부끄럽지만, 소극적인 나에게 칼라를 입혀준 첫 번째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창 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나 혼자만의 소소한 여행은 시작됐다.


정말 아무것도 안 물어봐?!
용문역 도착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용문역, 고요한 공기와 싱그러운 봄 날씨가 반겨주고 있었다. 30분 간격으로 오는 시내버스를 타고 여유로이 경치를 즐겼다. 물이 말라 약하게 흐르는 계곡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고, 비포장도로 골목 사이에 있는 낮은 집들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파전과 막걸릿집, 탱글한 묵도 보이고, 나무로 만든 액세서리, 염주 등 볼거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너무 느긋한 나머지 템플스테이 시간이 빠듯해 구경거리는 미뤄두고 부랴부랴 산을 올랐다.

용문사 올라가는 길
소원탑의 흔적
용문사 입구
1100년 된 은행나무 (아쉽게도 봄이라 노랗게 물든 모습을 볼 수 없음)

도착하자마자 아주 큰 은행나무가 수호신처럼 우뚝 서있었다. 1100 된 천연기념물답게 신성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무 바로 옆에 위치한 템플스테이 숙소는 한옥으로 되어있고 전통적인 외관과 현대적인 내부로 편안함과 따듯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템플스테이 숙소
새벽의 템플스테이 숙소

활동하기 편한 옷과 함께 배정받은 방은 4명이 쓸 수 있는데, 비슷한 나이대로 정해주신 것 같았다. 무작정 찾아와 아무 정보가 없던 나에게 모르는 사람들과의 첫 만남은 갑작스러웠고, 어색했다.


하지만 그 어색함은 금세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잘 아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편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한 이유였다.

나를 포함하여 총 세명이었는데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아 대충 언니라고 호칭을 정리했다. 서로 이름을 소개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언니' , 언니는 나를 '그대'라고 불렀다. 처음 들어본 호칭에 이질감을 느꼈지만 흥미롭기도 했다. 그저 지나가는 관계가 너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박 2일의 소중한 인연이 시작됐다.

휴식을 취하며 스스로를 성찰할 시간을 갖고 싶어 책과 몇 가지 필요한 물품들을 들고 왔는데, 그건 어깨만 무거워지는 일이었다. 자리를 잡고 폈던 책이


'같이 산책하러 가지 않을래요?'


라는 언니의 말에 50페이지를 넘어가기도 전에 가방 속으로  처박아졌기 때문이다. 숙소 밖을 나가 절을 구경했는데, 마침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꾸며놓은 연등이 있었다. 다채로운 색들 속에 고요함이 마음을 안정시켜주었고, 그 밑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추억을 남겼다. 그리고 살랑이는 바람에 의해 잠깐씩 들려오는 종소리는 신비롭고 일렁이는 어떤 무언가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꾸며놓은 연등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오로지 자연만을 느끼는 와중에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고 절에서의 첫 저녁 공양 시간이 되었다. 한 번도 절을 접해보지 않은 나에게 공양이란  반찬만 있고, 고추장에 비벼먹는 걸 상상했었는데 생각보다 푸짐하게 나와 만족감을 극대화시켜주었다. 깻잎, 부침개, 콩나물무침, 된장국, 과일까지 균형 잡힌 영양소였다. 항상 집밥보다는 밖에서 사 먹는 시간이 많고, 막상 집에서 먹더라도 인스턴트로 대충 때우는 나에겐 감사한 식단이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오로지 나에게 신경을 쓰며 건강한 식단과 평화로운 자연환경 속에서 대접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효리네 민박집을 보며 느꼈던 감정이랄까? 내가 본 이효리 씨는 본인을 사랑해주는 방법에 대해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 모습에 약간의 동경이 있었다. 그래서 그 순간의 대접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기분이 들어 나에게 있어서 잊지 못할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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