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헨리는 피치버그까지 걸어가요 by D.B. / 한정원 역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말이 있다. 나이 든 아버지에게 시든 꽃 같은 딸이 말한다.
"아부지, 저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어요."
그의 독백이었는지 아버지를 마주 보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따금 나의 말이 되어 마음속에서
떠도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 되었나? 나는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었나?”
어젯밤에는 엄마의 팔을 뭉근하게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뼈로 시작되는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나의 팔과 은근히 닮아있다. 어쩌면 오래도록 그리운 팔이 될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아빠와 시간을 보내고 온 저녁에는 어쩐지 무엇이든 되고 싶고, 될 수 있을 것 같다. 꿈같은 무언가가 되어야 할 것만 같다. 한편으로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산처럼 높고 거대하든, 돌멩이처럼 구르고 굴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림책 [헨리는 피치버그까지 걸어가요]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친구의 일화를 담고 있다.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는 그 소로 말이다. 피치버그까지 50km 거리를 소로는 한 발 한 발 걸어가겠노라 하고 친구는 기차 삯을 벌어 기차를 타고 가겠다고 한다.
접지선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노동하는 친구의 시간을, 반대편엔 숲과 강을 지나 피치버그로 향하는 소로의 여정을 나란히 보여준다. 친구는 바닥을 쓸고 장작을 나른다. 잡초를 뽑고 가축을 먹인다. 소로는 나무 사이를 걷고, 강을 건넌다. 고사리와 꽃을 꺾어 책 사이에 넣어 말린다. 마침내 친구는 사람들이 가득 찬 기차에 지친 몸을 실었고, 소로도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줄여나간다. 해가 진 기차역에 먼저 와 앉아 있던 친구가 달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소로에게 묻는다.
“기차가 더 빨랐지?”
소로가 답한다. “맞아, 나는 중간에 산딸기를 먹느라 멈췄거든.”
오늘 아침 문득 생각했다. 피치버그가 우리가 마지막에 다다르는 지점이라면, 누구나 가게 되는, 모두가 마주할 ‘죽음’이라면 어떨까? 빠르든 느리든 그곳을 가는 여정 동안 우리 모두는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언가가 되기 위해, 그 중요한 무언가를 하기 위해, 하고 싫은 일들을 견디고 버티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돈을 버는 일, 무언가를 사거나, 쌓아두는 일들, 그리고 다시 무너지고 좌절하는 나날들.
소로와 친구 사이에 있는 그 접지선만큼의 위치에서 나도 수없이 흔들린다.
무언가가 되어야 할 것 같고, 이루어야 할 것 같은 그 불안감과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사이에서, 이대로 충분하다. 완전하다. 좋아하는 일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더 많이 쓰겠다는 무중력의 마음들이 그저 멈춰있다.
그럴 땐 이 그림책을 펼쳐볼 것이다. 벌꿀을 홀짝이다, 벌떼에 쫓기고, 강물에 텀벙텀벙 빠지고, 너른 들판에 주저앉아 산딸기를 따 먹으며 바위처럼 태연하고 호수처럼 호젓한 헨리를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피치버그, 마침내 피치버그, 우리 모두는 피치버그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