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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인 길과 독기&독고다이·마이웨이 정신

[신흥멘탈(申興Mental)]

이 글은 독립탐정언론 <신흥자경소>에 2025년 8월 29일(오후 7시 20분) 올라온 기사입니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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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자경소] 원래 주체적으로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이전까지 사회적 기준을 잘 따라왔던, 말 잘 듣는 부류였다면 더더욱.


여기서 ‘주체적’이라 함은 타인들에 휘둘리지 않고 내게 맞는 길을 간다는 의미다. 타인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 뜻대로, 내 신념·의지대로 산다는 뜻이다. 반골(反骨) 기질이 강한 필자 입장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의미로 정의하겠다.


“세상 시스템에 굴종하지 않고 부당한 지시나 억압을 벗어나서 내 재능과 기질·성격·체질에 맞게 본연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서 당당하게 잘 살아간다”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이 그 길을 갈 수 있는 성격·기질·체질을 지녔느냐다. 자신의 성격·기질 등이 주체적인 길에 맞지 않는데 그 길을 간다면, 가면 갈수록 더 힘이 드는 게 당연하다. 주체적인 길을 갈 수 있는지 아닌지조차 타고난 성정에 달렸다는 뜻이다. 그러니 애초에 자신의 본질이 어떤지를 명확히 알고 실행해야 한다.


과거부터 늘 주변 말을 무시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아왔던 ‘마이웨이’ 유형 인물이라면, 앞으로도 당연히 그 기질대로 살아갈 확률이 높다. 하지만, 과거에 그러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 졌다면, 자기 본질과 다르게 그저 특정 운때에 그런 흐름을 맞이한 것뿐일 수 있다. 자기 근본 성질과 다른 운때·환경·흐름 속에서 자기의 본질을 벗어난 일을 꾸미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는 거다.


왜 자기 본질을 아는 게 중요하냐면, 주체적인 길을 간다는 건 인생에서 일시적으로 행하는 잠시잠깐의 이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길은 매우 근본적이고도 장기적으로 자기 삶 전체를 꿰뚫는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장기적인 걸 추구하려면 무엇보다 그게 본인의 근본적인 성격·성질·기질·체질에 맞아야 한다. 반대로 자기를 거슬러서 추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속 자아가 스스로 ‘살려 달라’고 절규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면 결국 이제껏 쌓아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할 수 있다. 실패를 포함한 모든 과정은 소중한 자산이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이는 게 좋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애초에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명확히 아는 게 삶 전체를 봤을 때 매우 유리하다.


다만, 아직 자기 본질을 잘 모르는 상태일지라도 일단 주체적인 길로 들어서서 경험을 쌓고 싶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어릴 때라면 그런 욕구가 많을 거다. 젊을수록 그 시행착오 과정도 충분히 나를 위한 담금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보자. 아마 당신이 그 길을 처음 가려고 할 때면, 주변에선 무척 다양한 방해 공작들을 펼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지금껏 주변 말을 잘 들어온 인물이었다면, 더더욱 주변에선 당신을 고깝게 볼 것이다.


왜 지금껏 ‘말 잘 듣는 애완견’인 것처럼 해 왔으면서 갑자기 그러느냐, 왜 지금껏 그토록 ‘충성하는 신하’나, ‘귀여운 모범적인 학생·직원’으로서 잘 살아왔으면서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하느냐


라며 다들 뭐라 할 것이다. 이상해졌다느니, 변했다느니, 건방져졌다느니, 헛바람이 들었다느니 별소리를 다 할 것이다.


물론 진짜로 그저 헛바람이 든 것일 수도 있다. 주제를 모르며 설치는 것일 수도, 혹은 잠시잠깐 기행에 빠진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본질적인 성격·기질·체질 등을 잘 모른 채로, 다른 멋진 누군가에 매료되어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일순간의 바람을 품은 걸 수도 있다.


반대로, 그 주체적인 길을 추구하는 행위가 운 좋게도 당신의 본질적인 성격·기질·체질 등에 딱 맞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헛바람 들었다’와 같은 주변 공격은 지금껏 지인들이 당신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달리 말하면, 당신이 지금껏 주변 말을 잘 듣고 순응하며 고분고분하게 잘 따라왔던 그 과정은, 실제로는 내적으로는 매우 심한 반항심을 그저 꾹 참고 또 참아온 스트레스의 과정이었을 거다. 이를 애써 무시하고 억누른 채 사회 시스템을 잘 따르는 척 연기해 왔던 거다. 그렇다면, 결국 어느 순간 그 인내심이 폭발하는 게 매우 자연스럽고도 적절한 과정이 된다. 내게 맞는 길을 가려고 떨치고 일어나게 되는 거다.


하지만 지금껏 고분고분해왔던 당신이 어느 순간 주체적인 길을 가려고 핸들을 튼다 해도 주변 대부분은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주변인들은 어쩌면 당신이 실패하기를 은근히 바랄 수도 있다. 주체적인 길을 가다가 실패·패배하여 다시 자기들 곁으로 돌아와 말 잘 듣는 애완견, 부하, 학생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무언가에 도전하다가 실패한 모습을 보이면, 주변인들은 그렇게나 좋아하는 것이다. 기뻐하며 물개처럼 박수를 친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자 어때? 이제 알겠지?”


당신이 얼마나 분수를 모르는 인간이었는지를, 이제는 알았냐는 뜻이다. 왜 이제껏 살아온 대로, 말 잘 듣고 고분고분했던 순한 양이나 애완견처럼 살기를 거부하고 갑자기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야생 호랑이’인 척했냐는 거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세상이 얼마나 냉정한지 이제 알겠냐는 거다. 그러니 다시 자신들 옆이나 밑으로 와서 고분고분하게 그저 부당해도 참고 견디며 소일거리나 하며 살라는 얘기다. 너는 ‘그 정도’라는 뜻이다.


그런 반응을 접한다면 누구나 아주 조금이라도 속에서 무언가 들끓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조금씩 다르다. 어떤 이는 속상한 말을 듣고 조금 분해하면서도 결국 다시 원래의 자기 자리도 돌아가는 방안을 선택한다. 그렇게 남은 인생을 ‘주변이 재단한 한계’ 속에 예속돼 살아가는 거다.


그러면, 그 자는 애초에 자기 바운더리를 벗어나기보다는 주변과 융화하며 살아가는 게 맞는 팔자였던 거다. 애석하지만, 기존 세상 시스템이나 주변의 기대·지시·속박에 맞춰 살아가는 게 타고난 자기 성정에 맞는 부류가 세상엔 더 많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그런 부류를 비하해선 안 된다는 거다. 주체적인 길을 걷지 않는 사람들 덕에 세상 시스템이 유지된다. 주체적인 길을 가는 사람들은 세상에 경종을 울리거나 혁명을 일으켜 사회 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할 수 있고, 또는 세상 어딘가에서 기존 시스템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며 세상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부류만 존재하면 이 시스템은 유지되지 않는다. 세상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는 건 그 안에서 열심히 자신의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사람들을 조롱하려거나 비웃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결국 혁명가든 독불장군이든 독고다이든 성실한 일꾼이든 누구든 간에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시스템 안에서 기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당신이 실패하고 돌아왔을 때 당신을 조롱하려거나 비웃는 주변인들이 얼마나 자기 얼굴에 침을 잘 뱉는 멍청이들인지를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성실히 따르는 자들도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고, 바로 본인들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인데, 자신들 곁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을 비웃는다는 것은 자신들의 처지가 우스운 꼴이라도 된다는 뜻인가?


남을 쉽게 비웃는 인간들은 대체로 무언가 큰 도전을 감행해보지 않았던 영혼의 소유자다. 비록 그 자의 현재 위치가 성공한 형태일지라도, 쉽게 남을 비웃는다는 것은 그 자의 성공이 그저 좋은 운때에서 운 좋게 얻어걸린 것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실상 그자는 큰 용기를 내어 주변을 거슬러 무언가에 크게 부딪혀본 경험이 없는 존재라는 거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은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길을 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방해하려거나 가스라이팅하려 든다는 거다. 그렇게 자신들이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임에도 그저 서로가 틀린 게 아닌 다른 존재들뿐인데도 각자 나름의 길이 있는 것에 불과한데도, 그렇게나 틀을 벗어나 도전하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떨치고 일어난 누군가가 실패하면 이들은 함박웃음을 짓는다. 참으로 가련하고 슬픈 짐승들이다.




그런데 자신의 길을 가다 실패했을 때 주변에서 “이제 알겠냐? 다시 우리들 곁으로 와”라고 외쳐대도, 절대로 돌아가지 않는 부류도 있다. 실패를 했어도, 여전히 고난의 길에서 헤매고 있더라도 그 부류는 절대로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기존 시스템에서 밑바닥 일이라고 치부되는 일로 생활비를 벌더라도 결국 계속 자기 길을 추구한다. 비록 주체적인 길이 가시밭길일지라도 그게 자신의 본질과 잘 맞는다는 걸 이미 절실히 깨달은 부류다.


이들은 소위 ‘자수성가형’ 인물인 경우가 많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신념대로 밀어붙여서 비록 초년엔 개고생 할지라도 결국 어느 운때에 이전까지의 모든 내공들이 합쳐져 크게 도약하는 스토리의 주인공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주변 시선에 민감하고 남의 말을 잘 따르는, 소위 고분고분한 성격은 사회 시스템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좋다. 그 세상의 잣대를 자신의 내면과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면 초·중·고·대학교 학생이나 회사를 다니는 일반 월급쟁이 역할을 별 반발심 없이 받아들이기도 수월하다. 특히 성인이 된 이후 맞닥뜨리는 ‘회사’라는 곳은 대체로 사장이나 상사의 각종 가스라이팅과 모욕, 갈굼, 길들이기를 감내해야 다닐 수 있는 공간이다.


고전적인 자수성가 유형 인물은 그 영역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다. 애초에 자수성가 유형은 사회적 시스템에서 적응하기 쉽지 않은 성질을 타고났다. 대체로 시스템 밖에서 자생하는 경우가 많다. 중졸이나 고졸로 사회에 나와서 밑바닥이라고 천시되는 직종 일을 하다 자기만의 루트(사업 등)를 밟는 거다. 이들은 타고난 성정대로 어릴 때부터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뜻대로 움직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외적으로 세상 시스템 안에서 최고의 스펙을 갖춘 자수성가형 인물도 있다. 이 경우는 사회적 가스라이팅에 휘둘려서 움직였던 게 아니라, 그 사회적 가스라이팅의 실체를 알고도 이를 오히려 역이용하기 위해 시스템 안에서 기를 쓰고 올라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잘 살펴보면 그 좋은 스펙을 얻기까지의 여정은 여타 금수저들보다 무척 험난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자수성가형은 시스템 안에서 올라왔든 밖에서 헤쳐 왔든 어떤 식이든 다른 유형보다 훨씬 많은 고난과 역경을 뚫고 오게 돼 있다.


만일, 당신이 주체적인 길을 가고자 한다면,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내면에 품고 있는 그 독기 및 독고다이·마이웨이 정신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주변 가스라이팅에 휘둘리지 않는 그 강력한 멘탈과 확고한 태도를 참고해야 한다. 이는 곧 주체적인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확실한 비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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