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한무열, 그는 UB그룹의 비서실장이자 UB전자의 상무직을 겸임하고 있는 남자로 그룹 내 살아있는 권력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자고로 백성들과 낮은 직급의 신하들은 왕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왕의 좌, 우를 차지하고 실무에 뛰어드는 최측근들이 가까운 주먹인 법이니까.
그는 그룹 내 입지에 비해 평판이 나쁘지 않다. 임원급 인사와는 눈도 못 맞주치는 대기업의 수직 계급 사회 속에서 평사원과 농담 따먹기도 자주 하고, 결과만 좋다면 과정은 크게 연연하지 않는 유도리도 갖춘 상사 캐릭터는 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르는 사람도 많고, 눈과 귀의 역할을 해주는 수족같은 사람들이 그룹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새벽 03:00
서울 한남동 주택단지 내, 한무열의 집.
깊은 잠에 빠져있던 한무열의 전화가 울린다. 한무열은 UB그룹 입사 이래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해놓은 적이 없다. 어떤 상황에도 대처하기 위해서다. 또한 숙면 중에도 의식적으로 잠귀을 열어둔다. 경쾌한 벨소리가 두번을 연속적으로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뭐지?"
어떤 일이건 새벽에 걸려온 전화가 반가울리는 없다. 피곤함과 분노로 잠긴 목소리 뒤로 다급한 목소리가 뒤따른다.
"한실장님?"
"어."
"저, UB과학기술연구소 나경호입니다."
나경호는 한무열이 비서실장이 되기 전 비서실에서 함께 근무한 후배였다. 원래 국방과학기술연구 전문가였지만 알 수 없는 이유의 인사발령으로 1년 정도 비서실에서 근무했고, 한무열이 그의 재능과 하고 싶은 직무를 알게되고 실장이 된 후 있어야 할 자리로 재배치 시켜준 자다.
"어, 경호, 이 시간에 어쩐 일..?"
아무리 아끼는 후배라도 공동 프로젝트도 없는데 새벽바람 부터 전화한 나경호에 짜증이 난 한무열이 되물었다.
"혹시 저희 연구원 내에 심부름센터라는 팀 아시죠?"
한무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심부름센터는 누군가 자세히 알아서는 안되는 비공개 부서다. 조직도 상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있어도 그 역할이나 관련된 업무내용을 알아서는 안된다.
"심부름센터에 왜 관심을 갖지?"
"실장님, 저희 연구소 내에서 솔직히 모르는 사람만 모르지, 왠만하면 다 압니다. 심부름센터... 회장님 뒷일 처리하는 비밀조직, 그런 거 아닙니까?"
"...허"
한무열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공공연히 다 아는 비밀처럼 말하는 나경호의 말이 기가찬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심부름센터에서 사람이 나갔는데요, 그 위치가 실장님 댁 주솝니다."
나경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이 벌벌 떨려오고, 식은땀이 난다. 나경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제가 오늘 임원급 당직자인데요, 심부름센터도 연구소에서 출타할 때 장비랑 외부출입보고서 제출하게 되어 있거든요? 근데 이게 뭐 거의 전쟁이라도 할 것처럼 전투장비들을 챙겨나가는데 그 목적지 주소가 실장님 주소더라구요."
"언제 나갔어?"
더 이상 나경호 외 연구소의 아랫 사람들이 심부름센터 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르는 것도 이상하다. 심부름센터가 UB과학기술연구소 내 조직인 이유도 이 연구소가 방산 관련 기술 중심으로 연구해서 최첨단 방산장비들을 보유하고 있고, 출타 시 이 장비들을 편리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다.
심부름센터의 주된 업무는 제거, 조작, 정보수집 등으로 예컨데 스파이라고 불리는 일을 하는 조직이다. 연구소 내 조직에 '심부름센터'라는 이상한 이름의 비공개 조직이 있는데, 그들이 출타할 때마다 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신형 장비들을 사용하고 또 무언가 기업에 이로운 상황이 연속적으로 생긴다면? 이건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것이다. 나경호에 대한 의문은 해결이 되었지만 더 큰 문제가 생겼다.
'회장님이... 날 버리려는 거야. 아니... 이미 버려진거야.'
마지막 만남이 분명 화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양아들 한태성. 코드네임 밤. 아버지로서 아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 다 들통나버린 것이다. 그 마음이 회장 김경민의 의지를 거스른 것이다. 한무열은 방심했다. 30년을 넘게 회장을 섬겼고, 굳을 일을 마다않고 해왔다. 그래서 자신이 지키고 싶은 아주 작은 한 가지 정도는 회장으로 부터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양아들에게 쏟는 사랑을 이해해주리라 착각한 것이다.
"그래.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회장의 과거 행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김경민은 자비가 없는 사람이고, 자신의 일을 해주는 사람을 짐승취급하고 뜻을 거스르면 아무렇게나 버려왔다. 한무열은 갑자기 머리가 뜨거워지는 분노를 느낀다. 김경민이라는 사람에게 한태성 정도의 인력은 복사기처럼 찍어낼 수 있을텐데. 자신이 사랑하는 딱 한 명의 사람. 그 한 명을 그곳에서 빼주는 결정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었을까. 억울함과 분노의 치를 떨면서도 한무열은 자신이 해야할 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가 30년을 넘게 회장 옆의 2인자로 있을 수 있었던 이유다. 감정에 먹히지 않는 이성적 사고.
한무열은 그의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려다 말고 침대 탁상 서랍을 열어 아주 오래되 보이는 구형2G폰을 꺼냈다. 1번을 꾸욱 누르자 신호가 간다. 한태성, 코드네임 밤은 자신의 양아버지인 한무열보다 빠른 속도로 전화를 받았다. 마치 잠도 안잔 것 마냥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아버지."
"들어. 이제부터 회사에서 지급해서 쓰던 모든 전자기계를 처리해. 그리고 떠나. 멀리. 공식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루트말고, 현장에서 작업할 때 쓰던 루트 중 너만 아는 것으로."
"무슨일입니까?"
초조한 목소리와는 상반된 고저없는 목소리에 한무열은 답답함이 느껴졌다.
"회장님이, 날 버리셨구나. 회장님 방식 알지? 절대로 나만 버리지 않으실게다. 그러니..."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만 끊자."
"네. 그럼."
한태성의 냉정하다고 느낄만큼 무감각한 반응에 한무열은 비통다는 생각과 동시에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양아들은 이렇게 자랐다. 명령에 복종하도록. 누구도 의지하거나 배려하지 않도록. 회장의 말이 떠오른다.
- 그게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나약함이지.
'너가 나약해서 다행이다.'
자신이 사랑했다 하더라도, 실제로 한태성의 인생은 자신의 아들로서의 인생보다 심부름꾼, 코드네임 밤으로 살도록 훈련받고 임무를 수행하며 산 시간이 길었다. 그래서 한무열, 그 자신은 한태성의 지켜야 할 존재가 되지 않았고, 약점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느꼈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그토록 한태성을 아들로서 사랑하게 된 순간이.
'고민은 나중에.'
자신이 회장이 부리는 심부름센터로 부터 살아남을 확률은 매우 희박했지만, 분명 한태성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최선을 다해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보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회장의 인생이 따르는 사람을 다 버리며 지켜온 인생이라면, 자신은 매 순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인생이기에. 다행히 회장이라는 사람을 명확히 이해하고 알기 시작한 순간부터 무의식적인 공포감으로 인해 도망치기 위해 준비된 것들이 있었다. 지금부터 그 준비가 얼마나 잘 되었는지 확인해볼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