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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센티아 Sep 29. 2021

일기를 쓰는 이유

꼰대라고 해도 좋아, 비슷한 이들과 연결되고 싶어

언제부턴가 글을 써 내려가도 속이 후련해지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다양한 경로로 스쳐 지나가다가 내 일기를 읽을 수도 있다는 자각이 강해지면서는 아니었을까?



이는 참으로 묘한 이중적 심리다. 누군가 내 마음을 함께 읽어주고 공감과 연민을 느끼고 표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 켠에 분명 있다. 그러니 블로그를 비롯한 각종 소셜미디어 따위에 주저리주저리 시시콜콜한 감정들을 담아 발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한 편으로는 아무런 교감도 될 수 없는 생판 타인이 의미 없는 흙 발자국만 깊게 패고는 사라지는 일들도 허다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무언가가 내 안에서 식어 버린 듯하다. 엄마가 내 일기를 몰래 훔쳐보고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심정과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은 내밀한 속을 멋대로 본 것이 짜증 나는 철부지적 심경이 공존하는 것처럼.


© tiomp, 출처 Unsplash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또다시 돌아왔다.



한동안은 제멋대로 마음이 식었다가 옛 연인이 그리워져 다시 슬그머니 기어 들어온 협잡꾼처럼. 열정이 차갑게 식어버려 떠났지만 세상천지를 둘러봤자 결국엔 그 밥에 그 나물 뿐이라는 냉엄한 사실을 깨닫고 원점으로 회귀하듯이 말이다.



역시나 어딜 가나 그 밥에 그 나물이 맞더라. 인생 별거 있나 뭐.

© xps, 출처 Unsplash


70억 가까운 인구 중에 다 만나볼 수가 없어 그렇지, 분명 나와 통하는 이들이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는 걸 확신한다.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카페 같은 곳에서 직접 만나기라도 하면 밤새 수다를 떨 만큼 쿵짝이 잘 맞을 것이다.



"나도 그런데 당신도 그랬군요!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연신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한없이 공감하고 교감하게 될 것이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이들과 만나면 마치 온 우주가 나를 친절하게 받아들여 주는 것만 같은 포근함과 후련함에 영혼이 치유되고 활짝 열린다는 것을. 그러니 이 땅 위에서의 내 미션은 어쩌면 될 수 있는 한 많이 그런 자들을 찾아내고 접선하여 함께 나누는 것일지 모른다. SNS는 유사 이래 이 미션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더더군다나 코로나라는 암흑의 시기에는 그 진가를 더욱 발휘하고 있으니, 다른 어디에서보다 여기에서 찾을 수밖에는 없다. 질적 측면이야 어찌 되었건 일단 지금은 이곳만이 유일한 길목이니 여기에 자리를 펼칠 수밖에.

© lilartsy, 출처 Unsplash


평생을 살며 글로벌, 다양성, 이문화에 대한 존중, 다른 것들에 대한 인정... 같은 패러다임을 귀에 못처럼 박고 살아왔다. 일반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런 환경에 처해 있었다. 그런 탓에 강박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곳을 탐구하고 새로운 사람들, 나와는 다른 이들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종용했다. 안 맞는 이들이 있어도 내 쪽에서 맞추며 그들을 수용해 보거나 집단에 속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마흔 줄에 접어들며 이제 그런 패러다임에는 작별을 고하게 된 듯싶다. 굳이 어디에 속한다거나 끼려는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냥 껄끄럽고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그냥 잠시 견디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 자유롭고 속박되지 않아도 되니 훨씬 편하다는 것을 여러 번 몸소 체험했다. 약간의 고독을 감수하면 자유로움으로 나 스스로에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 stilclassics, 출처 Unsplash


물론 아마도 가장 솔직한 이유로는 늙어서 그런 것 같다. 한마디로 꼰대가 되어 가는 것이다. 이제는 이질적이고 색다른 사람이나 사고와의 접속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피하고 싶다. 아니 그보다는 나와 비슷하거나 더 잘 맞는 사람들과 더 많이 연결되고프다는 염원이 강하다고 하는 게 옳을 듯싶다.



적어놓고 보니 편협하고 닫힌 사고관 같아 민망하기도 하지만, 솔직한 심경을 고백한 것이다. 더군다나 마흔 넘은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어차피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듯하다. 그저 나도 이 길에 이제야 편입한 것뿐이라고, 더 이상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혼자만의 고군분투는 그만두겠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늙어서 그렇다는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이유를 제외하자면, 이것은 어쩌면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지배를 받는 시대적 기조에 의한 자연스러운 흐름일 수도 있겠다. 모두가 보고 싶은 것들만 보면서 무한 루프의 알고리즘 안에서 스스로의 신념이 점점 더 강화되는 체계. 또는 감당할 수 없는 정보의 홍수와 SNS를 통해 과도하게 랜덤한 인간관계에 노출된 부작용과 혼란에 대한 자기방어적 기제일 수도 있다.

© CharuTyagi, 출처 Pixabay



어찌 되었건 이제 나는 있어 보이는 용어나 전달하는 형식 자체는 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은 다 걷어내고 그 안의 본질만 얘기할 작정이다. 겉치레 허식 따위는 질릴 만큼 질렸다.



마흔부터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거짓과 허세로 속마음을 꾸미지 않아도 되도록 살려고, 여지껏 공부하고, 배우고, 일하고, 돈 벌고 하며 스스로를 보호할 준비를 다져온 것이니까. 자, 이런 게 꼰대라면 나는 기꺼이 꼰대가 되어 그 특권을 향유하리라. 라테는 말이지!



꼰대를 운운하는 것들도 불과 1,20년이면 그 극혐의 전당에 발을 들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늙을 수밖에 없으므로. 실컷 젊은 동안 이상과 혁명을 부르짖다가 나이 들면 그동안 모은 것을 지키고 약해지는 자신을 지켜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인간 삶의 본질 아닌가! 그러니 조금의 지혜의 싹이라도 트인 자라면 결코 너무 오버하며 젊은 체도 하지 말지어다. 한때 우리는 모두 젊었고, 언젠가는 너도 반드시 늙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테니.

© fan11, 출처 Unsplash


아무튼 더 이상은 내가 낄 수 없는 세상, 내 것이 아닌 영역에 대해서는 그 어떤 욕심도 미련도 갖지 말자. 깨끗한 단념과 포기할 것은 버리는 깔끔함이야말로 진정한 미덕일지니. 한국 사회에서도 다들 서서히 그렇게 하고자 하는 풍조가 만연해가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하다만.



오로지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갈등은 불가피한 것일지 모른다. 너도 나도 자신의 EGO와 욕망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며 살아보겠다는데, 물리적 한계가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서로 부대끼는 일은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적자생존'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일견 인간성을 부인하는 것만 같은 용어가 삶의 본질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음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럼에도 또 때로는 자비로와지려고 하고 자신의 안위가 확보되기만 한다면야 기꺼이 함께 나누고파 하는 우리 안의 선한 면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 fresh_studio, 출처 Unsplash


그런 의미에서 나도 결국 또 계속 글을 써 내려갈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 나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한 세상과 타인과 부딪치며 겪을 갈등은 죽는 날까지 끝이 없을 테고, 그 투쟁과 타협의 역사를 기록해가며 그것이 필요할 누군가에게는 남기는 것이 내 삶의 사명일 테니 말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 그러한 소명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아직은 더 고집쟁이가 되어가거나 사고가 굳어져 강화되어가는 것이 나는 두렵지 않다. 그보다는 나와 비슷한 부류에 이왕이면 더 많이 접속하고 연결되고 싶다는 염원이 훨씬 더 강력하다. 아직 충분히 만나보지도 못했으니까. 내 남은 삶의 대부분은 그렇게 하기 위한 여정이 되지 않을까. 그것이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 진정한 이유다. 내 쪽에서 먼저 계속 나를 발신해야 그들이 나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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