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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센티아 Nov 17. 2021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 미치겠을 때

글로라도 쓸 수 있다면 괜찮아

의심은 살아가면서 균형을 유지하는데에 필수적인 요소다. 인간은 의심한다. 고로, 살아있다.
가장 커다란 의심은 자기 자신에 대해 품는 의심이다. 우리는 어떻게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잘 다스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낙관주의를 지켜갈 수 있을까? 바로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숙제가 아닐까?
사는 동안 우리는 돌고 또 돌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글러스 케네디의 '빅 퀘스천' 중에서



한동안 글을 쓰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손에 도무지 잡히지가 않았다. 어쩌면 마음이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이 정리가 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뭐 특별히 힘든 일이라도? 글쎄, 따져보자면 언제나 힘든 일들이야 지천에 널려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드러나게 큰 사건 사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엄청나게 나쁜 일이라고 까지는 인식하지 못했던 자잘한 힘듦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눈치채지 못한 어느 순간에 마음이 그냥 뚝 부러져버리는 것 같다.


기민하게 내 아픔을 내 스스로가 알아차리고 정확한 진단과 올바른 치료를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중이 스스로 제 머리를 깎을 순 없는 법이듯 너무 가까워 내 눈에는 잘 보이질 않는 내 상처를 어떻게 내 스스로 다 치료해 낼 수 있으랴.

© mathildelangevin, 출처 Unsplash


아무튼 한동안 나는 한가로이 앉아 차분하게 글 따위를 쓰고 있을 마음의 상태가 아니었다는 걸로.


어째서 살다 보면 이따금씩 그런 걸까? 가장 간절하고 긴급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추슬러야 할 타이밍일수록 그런 마음을 살피고 보듬는 일이 가장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어째서 우리 마음이란 이런 식으로 작동을 하며, 인생이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일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그냥 그런대로 살고 있네.


그렇게 우리 모두 떠밀리듯 흘러 흘러 삶의 물결을 둥둥 떠간다. 나도 결국은 이렇게 둥둥 뜬 채 흘러가는 모양이다. 남과는 달리 나름 내가 마음먹은 방향을 향해 헤엄쳐 가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마다 대단한 착각을 하고야 말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지껏 살며 수도 없이 인생의 파도는 내게 그걸 깨우쳐 주곤 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찰싹찰싹.


"정신 차려! 이 생은 네 뜻대로 되는 게 아니란다. "

© qwitka, 출처 Unsplash


발버둥 쳐 바야 혼자 잘난체해봐야 언제나 가차 없이 한대 후려 맞고는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인간이란 운명 앞에 세월 앞에 참으로 무력하고도 나약하다는 진실. 어린 시절엔 누구나가 다 장대한 꿈과 높은 기대를 품어보지만 삶이라는 여정의 중간 언저리 즈음에서 애초의 이상에 가까워있거나 그걸 뛰어넘어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도 한 번쯤 정상에 올라가 본 이라면 비록 이후에는 내리막길만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한 번은 극적으로 열정을 끝까지 불태웠다고 당당히 말이라도 할 수나 있을 테지. 정상 언저리에도 못 가본 채 뜨뜻미지근하게 만 생을 살다 마감하는 대부분의 중생들은 대체 무슨 말을 남기며 삶의 의미를 결론지어야 하나.


나 말고도 70억 인구 대부분은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자위하며, 불운한 사건 사고로 뜻밖의 허무한 객사를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며 안도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물론 나는 할말이 없다. 닥치고 꾸역꾸역 난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살다 갈 밖에.


© gabriellefaithhenderson, 출처 Unsplash


가끔씩 헷갈릴 때마다 나는 나에게 묻곤 한다.


대체 이 삶에서 넌 뭘 원하니?

어떻게 살고 싶은 것이니?

어떤 모습이고 싶니?


그러면 언젠가 될 뻔도 했지만 다시는 영원히 될 수 없을 '수 만개 경우의 수의 나'라는 가능성들이 눈앞에 어른거려 마음이 부서질 것만 같다. 그 수만의 간발의 차로 어쩌면 될 수도 있었던 무수한 나 중에서 결국은 내가 실제로 선택한 단 하나의 현실의 내가 지금 여기 거울 앞에 앉아서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쩐지 너무도 처량하고 애처로운 눈매를 하고 있는 그 몰골.


왜?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봐?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가보지?

현실로 존재하는 지금의 이 내가 영 못마땅하기라도 하단 말인가?

어째서 사랑해 마지않는 심정이 아닌 것이냐?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어 못 배기겠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말인가?


과연 나는 이렇게 되고 싶었던 것일까?


수많은 순간순간의 선택들로 길을 내어 여기까지 몰고 몰아온 오늘의 나 자신. 후회도 미련도 없이 살고 싶었지마는, 요즘 들어서는 부쩍 그런 하나 쓰잘데기도 없는 감정들이 자꾸만 스멀스멀 곰팡이처럼 마음에 피어 들어 괴롭다. 누구 하나 붙잡고 이런 하소연할 사람도 없고 참. 입이라도 뻥끗했다간 다들 멀치감치 도망가버릴 것만 같아 나는 무섭다.


그래도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걸 되돌릴 만큼 이 내 현실이 또 엉망진창인 것은 아니다. 당시에도 이럴 줄 막연하게 예상은 하며 다 내가 심사숙고해 고르고 골랐던 것들의 결과가 이 내 오늘의 모습이니까.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원망할 생각은 없다. 원망할 명분이 없어서가 아니라 해봤자 하나 소용없는 짓임을 알기 때문에.


© kymellis, 출처 Unsplash


그러니 선택지는 결국 또 두 가지다. 언제나 그러했다. 더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지금의 현실을 어떻해서든 좋아해 보던지, 아니면 이 상태에서나마 조금이라도 더 마음에 드는 쪽으로 고쳐나가보던지.


물론 둘 다 쉬운 일은 아니다. 석연치도 않은 걸 좋다고 맹신하기 위해서는 끝도 없는 자기 암시와 체면이 필요하다. 그러니 날카로운 현실의 반박에 대해 방어적 기만으로 적당히 억지도 써야만 한다. 대부분의 늙은 사람들이 택하는 길이다.


알면서도 생떼를 쓴다는건 성격상 나로서는 참 괴롭기 그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별 수는 없다. 괴로워지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택한 것들이 맞는다고 우기던지 적어도 스스로 그렇게 믿어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그렇게 한다. 그러니 그래도 괜찮다. 생존하는 것들의 최소한의 권리라고 여기자.


그래 내 인생 그다지 나쁘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경우와 상황이 있었단 말이다. 맥락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던 거다. 그 누구에게도 평가받거나 인정받을 필요는 없다. 욕도 들어먹고 뒷담화로 까이기도 하는게 정상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세상 천지에 단 한명도 없을테니까. 그저 나만 모르고 살면 될 뿐.

© kelli_mcclintock, 출처 Unsplash


두 번째 길은 조금 더 어렵다. 새하얀 도화지에 새 그림을 채워 넣는 일이라면 몰라도 이미 망친 그림 위에 덧칠을 해 수정해나가야 한다. 아마도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그림을 완성해 내지는 못할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큰 회한과 자괴감에 한시도 견딜 수 없을 것이므로.


나의 경우는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섞어가며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참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현상 유지를 하며 정신 승리하는 쪽에 치우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고인 물이 되는 듯했다.


그렇다고 궤도를 재수정 하려니 무능하고 보잘것없는 스스로를 만나야 하기에 울고 싶어질 때가 많았다. 아니 '죽고 싶어'라고 해야 더 정직할 것이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은 이제 쉽게 꺼낼 수가 없다. 아직은 길러야 할 아이가 있기에. 


이제 내게는 죽고싶다는 말은 장난처럼도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문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토록 속답답함이 느껴지는 건가? 아이 엄마가 되고부터 해서는 안된다고 굴레지어진 것들이 너무 많아. 그래서 가뜩이나 힘든 삶이 더 살기가 갑갑해 진 모양이다.



© betteratf8, 출처 Unsplash


멋들어진 결론으로 끝을 맺었으면 좋겠지만, 아직 내게는 그런 것이 없다. 내 투쟁과 고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조울증처럼 때로는 세상 전부를 가진 듯 들뜨고 만족스러웠다가 어떨 땐 거대한 우연의 조작으로 내 인생만 요 모양 요 꼴인 것 같아 한없이 우울하다. 세상이 조금만 더 내게 상냥하고 너그러웠으면 싶다. 정작 나는 세상에 대해 까칠해진지 오래인 주제에.


한편으로는 포기했으면서 한편으로는 기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왜 이렇게 이중적인 것이냐? 내 삶의 태도는.


그래도 최소한 이렇게 글이라도 끼적일 수 있다는 것이 차라리 지금은 얼마 전에 비하면 한참 건강한 것이리라. 글조차 적을 마음이 들지 않게 손가락마저 움츠러드는 날이야말로 최악이다. 그때는 정말이지 마음이 어둡고 축축해있는 시기이므로.


최소한 마음에 가득 고인 고름이라도 글로 싹 다 짜내 버릴 수 있다면 그걸로 나는 괜찮다.

이 인생 그래도 잘 살아낼 수 있다!



내 앞에 놓인 삶의 여러가지 복잡한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들, 눈앞에 펼쳐진 길이 어둡고 질척해 모든 것이 불가능해보일만큼 힘들때 더더욱 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들, 그런 질문들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그 말.
이제 내게 과연 어떤 가능성이 남아있겠는가 하며 절망감에 빠졌을때, 관성에 따라 어떻게든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고 느낄때 나 자신을 추스르며 해주어야 하는 그 말.
그것은 바로
'굳어지지 말고 균형을 잡을 것, 그리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써볼 것' 

더글러스 케네디의 '빅 퀘스천' 중에서


© langll,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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