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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센티아 Feb 16. 2022

아홉 살, 육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홉 살 외동아들은 아직도 잠을 혼자 자지 않으려 한다.


어떻게 해서든 엄마 곁에 꼭 붙어 잠을 자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아빠를 거실에 재우려 난리다.



남편과 나는 생체리듬이 영 다르다. 남편은 그야말로 미라클 모닝이 저절로 되는 얼리버드이고, 나는 밤이 깊어갈수록 정신이 영롱해지는 올빼미 체질. 새벽 4시면 눈이 저절로 떠진다는 남편은 9시가 조금 넘으면 우리와 함께 영화를 보다가 꾸벅꾸벅 졸기 일쑤다. 아들은 나를 닮은 탓인지 올빼미인 것은 동일한데, 이상 야릇하게도 잠이 많은 우리 부부와는 영 딴판으로 신생아 시절부터 도통 잠이 없어 진을 빼게 만든다.



초등학생이면 9시간은 자줘야 키도 쑥쑥 자라나고 두뇌활동도 최적의 상태가 된다고 하던데. 이 녀석은 유치원 시절에도 7,8시간 밖에 자지 않고는 거뜬하게 깨어나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또래보다 키도 큰 편이고 체력도 뒤지지 않는 것 보면 잠과 성장 관계가 반드시 '9시간 이상'이라는 숫자로 수치화되거나 일반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어찌 되었건 이런 면에서 내 인생은 수틀려버렸다. 외동아들의 침대 공세로 우리 부부는 어른 생활(?)은커녕 같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자는 일도 어려웠다. 잠자리에 점점 예민해지는 마흔에 접어든 나는 잠버릇이 고약한 아들로 인해 밤사이 몇 번을 깨거나 뒤척이며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 어미의 정과 품을 갈구하는 어린 아들에게 한없이 애정과 연민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째서 아홉 살이나 된 녀석이 여전히 이토록 제 나이에 걸맞은 잠자리 독립을 못하는 것인지 이해 불가와 함께 역정이 난다.



이런 상황은 대체 언제까지 계속될까? 설마하니 올해 내내, 아니면 열 살이 되어서까지도 이러지는 않을 테지? 작년에도 똑같이 대뇌였던 말들을 올해 또다시 하게 될 줄이야. 그렇다면 혹시라도 내년에도 여전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중학생이 되어서는 이 부부간 각방 생활이 드디어 끝날 것이라고 중얼거리고 있으려나.



왜 나는 이전 어느 시점에서인가 더 단호하지 못했을까? 분명 아이가 혼자서도 잘 수 있도록 길을 들일 수 있었을 어느 중대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남편도 노력이나 요령이 부족했거나 더 단호하지 못했기에 결국 실패로 돌아간 듯싶다. 아이는 또 어째서 그토록 나에게 강한 애착을 요구하는 성향을 가진 것일까? 정 반대 상황에서 자라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 불가한 영역이다. 여러모로 특수했던 나의 유년기 시절은 아들을 기르는데 아무런 참고도 될 수 없어 이따금씩 나를 몇 곱절 헤매게 만든다.



엄마의 살가운 정을 모르고 자라났던 나. 그래서 내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이란 언제나 절대치가 부족한 것일까? 나는 한다고 해보지만 이 정도로는 원체가 도저히 미치지도 못할 수준으로 적은 것일까? 애정과 예쁨을 갈구하는 아들의 바램이 솔직히 나는 버겁다. 내 사랑의 양동이는 이것밖에 되지를 않는데, 아들의 애정의 항아리는 부어도 부어도 차지 않을 만큼 큰 모양이다. 그러니 언제나 남는 건 나에 대한 자책과 절망뿐.



나는 좀 모자란 사람인가 보다. 애정이 모자라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받은 것이 많지 않은 듯싶다. 받았을지도 모르나 내 인식에 닿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한다고 해보지만 언제나 니 기대에는 못 미치는 그런 사랑을 주게 된다.



그래도 나는 나를 보호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곤 한다.


아니다. 아홉 살에도 혼자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건 문제가 있다. 대체 뭐가 무섭다는 것인가. 귀신 나오게 심란한 집안 환경도 아니고, 여느 집 부럽지 않게 꾸민 이 쾌적한 공간, 고 예쁜 잠자리에서 어째서 혼자는 못 자겠다고 생떼를 쓴다는 말인가!


8시간도 채 자지 않고 말똥말똥하게 깨어나는 아이는 힘들다. 나서부터 줄곧 그래왔다. 유독 잠이 짧은 아이. 그래, 그래서 나는 지난 8년간 너를 키우는데 유난히도 애를 먹었다. 부모에게 치대는 아이.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커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이제는 이런 식인 것은 좀 그만하고도 싶다.



아이가 빨리 커버려서 섭섭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던데,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것 아닐까? 아마도 형제가 없는 외동이다 보니 유독 부모와 관계가 끈끈하고 돈독해서 그런 것일 거라고 추측해 본다. 우리 세 식구라는 강한 유대 관계 속에서 누구보다 부모와 동등하게 대우받으며 자라다 보니, 가끔씩 아이로서의 자기 위치(?)를 망각하는 모습을 자주 보곤 한다. 부모가 하면 자기도 똑같이 해야 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는 신념이 어느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과 아이는 구별이 있어야 하지만, 어른이 하는 모든 것을 자기도 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잠도 많이 자지 않는 것 같다. 부부끼리 깨어나 있거나 둘이서 대화를 나누면 소외감을 느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부부간 대화는 점점 줄어든다. 더더군다나 코로나 상황은 이런 세 식구만의 고립을 더욱 키워 냈다. 기이한 상황이다.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했던.



나는 더 이상 이 글을 써 내려갈 수 없을 듯하다. 무한 애정을 요구하는 아이가 또 곁에 와서 내가 무언가를 하는 걸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다. 지금은 방학 타임. 아이는 엄마가 혼자만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는 것이 싫은 모양이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뜻 모를 방식으로 어떻게든 훼방을 놓는다.



어느 정도 선에서 그래도 끝이 있으리라 믿었던 육아에는 도무지 끝이 없다. 지금의 방식으로 시달리지 않게 되는 시간은 대체 언제인 걸까? 나는 차라리 무심하게 제 방으로 들어가 문도 잠가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아들을 꿈꾸고 있다. 그러면 나 역시 방 문을 닫아놓고 혼자 실컷 글도 쓰고, 스스로도 맘껏 챙기며, 하고 싶은 대로 내 사업과 비전을 펼쳐나가보고 싶다. 남편과 단둘이 질리도록 수다도 떨고, 둘이서만 산책을 가거나 동네 카페에 들러 보고도 싶다.



부모님 도움 없이 두 부부가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이런 삶이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그래서 덜컥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임신 출산을 벌이고 어느덧 8년. 정신없이 몰아쳐온 그 세월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자식 사랑하는 마음에 무슨 의심을 품겠는가? 그래도 힘든 것은 힘들다. 아이도 알아주었음 싶지만, 어불성설이다. 내가 부모의 깊은 사랑을 이 나이까지도 미처 다 알 수 없듯이, 아이는 이 글을 읽는다면 분노나 억울함을 느끼고 토로할 수도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떡해서든 너에게는 꽁꽁 숨기고 보여주지 않을 작정이다. 하지만 나도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니?



이렇게 해서라도 내 마음속에서 털어내지 않으면 나는 너를 챙겨줄 힘도 정신도 나지 않을 텐데. 나도 살아야 너를 돌볼 것 아니냐 이눔아.



지금의 모든 문제들은 언젠가는 끝을 보게 될 것들이다. 그래 나도 안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죽고 없지 않겠는가. 언젠가만큼 무책임하고 아무 의미 없는 단어도 없는 듯싶다. 지금 '당장' 나는 여기에서 죽겠으니까.



괜찮다. 다 괜찮다. 결국 그 한마디가 필요했던 것 같다. 언제나 그랬다. 다 괜찮다. 결국에는. 나도 아들도 남편도 다 괜찮다. 어지러웠던 내 마음만 정리해 내고 다스려지고 나면 순식간에 모든 안 괜찮았던 것들은 또다시 괜찮아 보이기 시작한다. 그저 마음의 쓰레기들을 깨끗이 비워낼 글쓰기가 필요했을 뿐.






#삶이뜻대로되지않아미치겠을때 #글로라도쓸수있다면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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