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통을 겪는 이들을 위한 휴식의 공간을 주고 싶다
코흘리개 꼬맹이 시절, 나는 참 울음도 투정도 많았다. 집의 유일한 딸이자 막내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투정 부려서 원하는 것을 쉽게 얻기도 했다. 이건 딸인 막내들의 특권이지 않나 싶다. 그런 점에서 장남이자 아들이었던 우리 친오빠에게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런 내가 벌써 내일모레면 서른이다. 코흘리개 꼬맹이 시절 서른 살은 무척이나 대단한 어른처럼 보였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 나이가 되어 보니 그냥 ‘어른인 척’ 한다는 것을 빼면 그 꼬맹이와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짜증 나면 투정이나 부리고 확 울어재끼고 싶은 거 보니 말이다. 다만 그때처럼 받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 빼고는.
지금의 내가 오십 대를 생각하면 또 '어른'인 것만 같다. 그 나이에는 어느 정도 삶의 지혜를 갖추고 삶을 관망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것만 같다.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을 그때는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하지만 오십 대인 우리 엄마가 여전히 고민거리가 있는 걸 보면, 사람에게는 그 나이에 많은 인생 숙제는 늘 있기 마련인가 보다.
나의 오십 대는 어떨까. 문득 20~30년 뒤를 상상해보면, 지극히 평범할 것 같다. 자녀는 한 두 명 정도 낳고 돈을 모아 아파트 한 채 정도는 마련하지 않았을까. 형편이 되어 누군가 아이들을 돌봐준다면 무난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는 아줌마겠지. 다들 그렇게 살아가듯 말이다.
# 커피를 내리면서 얻는 마음의 평온, 내 꿈은 카페 주인
내가 원하는 나의 오십 대는 커피 볶는 아줌마다. 커피를 내릴 때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곧장 주방으로 가서 원두를 갈고 물을 끓여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린다. 주방을 진한 커피 향으로 물들이며 스스로를 잠에서 깨우고 출근 준비를 한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은 잡념도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예쁜 화원으로 꾸며진 카페를 운영하고 싶다. 마음이 예쁜 사람들이 모여 같이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누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카페 주인이 되고 싶다. 힘들 때 지나가다 들려서 힐링을 받을 수 있는 카페 말이다. 이런 카페를 운영하면서 책도 쓰고 심리 공부도 병행하며 다양한 도전을 하고 싶다.
몇 달 전 심적으로 힘든 일을 겪고, 그 시기를 보내면서 심리상담센터를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나의 아픔을 털어놓고 공감을 받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비용이 높다는 점이다. 단발적인 일회성 상담으로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기도 하는데, 꾸준히 상담받기에는 비용면에서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 힘든시기를 견디는 이들이 조금은 덜 아프게 견딜 수 있도록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하나씩은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나 역시 극심한 취업난, 힘들게 시작한 직장생활, 부모님과의 이별, 소중한 생명을 떠나보낸 유산 등 힘든 시기를 견디며 몸과 마음이 고갈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시기는 누구나 겪기도 한다. 하지만 '어른'의 나이이기에 징징대며 투정 부릴 수만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저 이 시기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잘 극복하며 지나가도록 흘려보내야 한다.
이런 시기들을 보내며 심리 관련 서적을 읽고, 민간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일기를 쓰며 나에게 집중을 하고, 다른 사람의 에세이를 읽고 공감하며 그 아픈 시기를 흘려보냈다. 그러면서 비용에 부담 없이 사람들이 힐링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의 오십 대에는 지금보다도 더 어른 같기를 바란다. 성장하는 만큼 성장통을 겪듯 어른이 되기 위해 아픈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작지만 위안을 주고 싶다. 나만의 카페를 운영하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 그 공간에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책과 심리 관련 서적이 있고,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줄 향초와 부드러운 피아노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나는 거기서 따뜻한 핸드드립 커피를 내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아픔의 시기를 조금은 덜 아프게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