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점에 물린 영끌족, 그게 바로 나였다. 차도 명품백도 없던 내게, 통장에 찍힌 마이너스 2억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또 다달이 나가는 이자는 내 월세보다 비쌌다. 드라마 가을동화 중 송혜교의 대사처럼 '나, 돈 많이 필요해요.'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투자로는 답이 없었고 그나마 유리한 게 직업이었다. 잠시 소중함을 잊고 있던 근로소득이 절실해졌고 더 높은 연봉의 직장으로 이직을 결심했다. 월급 200만 원이 늘어나는 대신 고강도의 노동이 따라왔지만, 어떻게든 메워야 했다.
결국 공장형 병원에 취직했다. 그게 22년 6월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물론 앉을 틈 없이 일하는 때가 많았고 밤에 자려고 누웠다가 어깨가 아파 잠이 안온 적도 있었다. 간혹 치료를 거부하는 나이롱환자 때문에 '내가 뭐 하는 거지'라는 현타가 스치기도 했지만 그중에서도 행위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또 일을 하면 할수록 인센티브라는 정직한 대가가 따라왔다. '이거 하나에 아메리카노 한잔이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다소 기계적인 노동이 적립금 쌓듯 재밌게 느껴지기도 했다. 당장 내게 필요한 건 배움도, 워라밸도 아닌 돈이었으니 알맞은 직장이었다.
그러나 수입이 다소 늘어난들 눈 감고 일어나면 하룻밤새에 더 많은 숫자가 증발해 있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면 카페 정도는 혼자 계산하곤 했는데 그게 꺼려지기 시작했다. 간편식을 좋아했지만 더 자주 편의점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래봤자 바닷물을 양동이로 퍼내는 수준 밖에 안 됐지만 그럼에도 소비할 수 없었다. 내가 벌인 일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만 원 한 장이 아까운 나와 하루에도 몇 백만 원씩 등락하는 내 계좌,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그 무렵 지수는 하방에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지만 잔고는 여전히 모두 파란 불이였다. 잠시 오르는가 하면 죽은 고양이도 한 번은 뛰어오른다는 데드캣 바운스였고, 주식시장을 탈출하는 건 SF 영화에서 그리는 먼 미래 같았다.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 몸을 갈아 넣었고 월급날이 될 때면 숨통이 좀 틔였다. 여기서 1년만 버티면 좀 낫지 않을까. 새로 시작할 수 있어. 그럼 투자 같은 거 다신 안 할게요. 제발 탈출하게 해 주세요. 믿지도 않는 신에게 빌곤 했다.
그러나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 튀어나왔다. 추석 연휴 모처럼 길게 쉬는 휴일,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대표였다.
40대 초반의 미혼이었던 그는 처음엔 유쾌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학 땐 입시 학원을 했는데 입소문을 타 사업이 잘됐고 그 기질을 십분 발휘해 차린 이곳 역시 불황에도 매출이 높았다. 법대를 잠깐 다녔다는 그는 두뇌회전이 빨랐고 경영에도 바삭했다.
그런 그가 업무 시간 외에 연락을 한 적은 있지만 초반에 몇 번, 적응하기 힘든 건 없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가끔 거슬린다 싶은 개인적인 질문도 있었지만, 다른 직원들과도 격 없이 지내는 호방한 타입이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입사 후 한 달이 넘었을 때쯤 구두로 약속한 부분이 이행되지 않은 것을 꺼내자 마찰이 생겼고 껄끄러운 사이가 되었다. 그 후로 은연중에 다른 부원장만 챙겨주는 게 느껴졌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난 내 일만 잘하고 급여만 제대로 받으면 되니까. 물론 치사하게 구는 게 짜증 났지만 여느 직장인처럼 속으로는 욕해도 겉으로는 웃으려 했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걸려온 전화가 더욱 의외였다. 더군다나 추석 당일 같은 날 대표에게 연락이 오는 건 흔친 않았지만 짧은 인사말이겠거니 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윽고 들려온 내용은 그와의 껄끄러운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나 역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에 초반엔 성심성의껏 대꾸했다. 그러나 점차 이어진 말엔 알맹이가 없었다. 이쯤 마무리되나 하면 또 다른 얘길 이어갔고 '이런 얘길 왜 나한테 하지?'라는 생각뿐이었다. 종료버튼을 누를까 말까 수십 번 고민하다 자리를 비운 지 3시간이 돼서야 부모님이 부르신다는 말로 겨우 수화기를 놓을 수 있었다. 너네 대표 진짜 이상하다. 무슨 통화를 세 시간씩이나 한대. 그러게, 많이 심심한가 봐.
엄마에겐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지만 꺼림직하긴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