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처음이었다. 첫 만남 이후 연락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건축가 집안의 장남에 비하면그는 삽 하나 들고 설렁설렁 걸어오는 수준밖에 안 됐다. '나이 때문에 쫓겨서 결혼하고 싶진 않아요.' 처음부터 묻지도 않은 얘길 하길래 그가 내게별관심이 없다 판단했고 훨씬 적극적인상대와 인연을 만들어 가려던 참이었다. 서울 태생이라 역시 도도하군. 하지만아쉽지는 않았다. 이 바닥에 널린 게 사람이었고내게는많은 미차감 프로필이기다리고있었으니까. 선생님 이 분이 정말 뵙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매니저가부탁한 적도 여러 번이라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다. 하하.
한참 후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생각과는 전혀 딴 판이었다. 서울역에서 처음 본 뒤 내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애프터를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다고. '죄송합니다. 좋은 분 만나시길 바라요.' 이 멘트를 듣게 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으니까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고했다. 또 그는본래 말 수가 적고다소 조심스러운 성향처럼 보였다.그래서 발신자를 보고 다소 놀란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된 건 군자역의 한 고깃집에서였다.처음보단 긴장이 풀려서인지 훨씬 열성적으로 직진하는 게느껴졌다. 삽을 양 어깨에 이고 단단히 채비를 하고 온 느낌?하지만 2퍼센트 정도 끌림이 부족했고 고심 끝에 출근길 지하철에서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짧은 시간이나마 잘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으신 분 같은데 저랑은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중략... '
전송 버튼 위에 올려진 엄지가 머뭇대는가 싶더니빠르게 임무를 마치고채팅방을 빠져나왔다.애매하다 싶으면 정리하는 게 맞지.막 숨을 돌리려는데검은 화면위로 예상치 못한 이름이 떴다.엥?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30초 정도 지났을까. 결국입술을 뗐다.여.. 여보세요?
나는 그순간을 수십 번회상했다.내가 그때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당시 머릿속은 빚으로 가득 차 있었다. 투자 실패로 마이너스 통장에 찍힌 아홉 자리숫자. 따지고 보면 몇 년바짝 일하고 덜 쓰면 회복이 가능한 금액이었음에도 왜 그렇게까지무너졌을까 싶은데, 그건 내가 번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출근길 차에 치였으면 했던인턴시절,퇴근 후 다시 새벽녘처럼 어스름이 깔린 육교를 지날 때면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까 아래로 빠르게 지나가는 전조등 불빛을바라보곤 했다. 이후멀리 떠나온 수도권에서도결국은 떠돌게 됐지만참아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대표 원장들이 종종 내 머리를 쓰다듬고볼에 손을 가져다 댈 때. 일을 마친 늦은 저녁,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그날 일을 곱씹었다. 터벅터벅 10분 남짓 걸어 신발이 뒤엉킨 좁은 현관에 들어섰다.다 그만하고 싶었다. 그러나계약기간이 한참 남은 이방과 저년차로서 구직의 어려움부터 떠올리는소름 끼치는 현실감각에 자조 섞인 울음을 뱉었다. 이내 눈물이 마르고 이력서를 고쳐 썼다. 그렇게 모은 돈이었는데, 그걸 잃었다.
인간은 원래 득 보다 실을 크게 느낀다고 한다. 상실에 있어 남들보다 더욱뼈 아픈 고통을 느꼈던 나는, 늘 손절이 어려웠다. 사람이든 주식이든.끝이 보이는 관계일지라도 꽉 움켜쥐고 있었고, 회복될 기미가 없는 종목에 물을 부어 탈출을 꿈꿨다. 그러나 결말은 피가 뚝뚝 흐르는 만신창이가 되거나,원액이 13 퍼 밖에 되지 않는 맹맹한 바이오 주스를 양산해 내는 것이었다.(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처치곤란이다.) 다소 당혹스럽던 통화가 있고 얼마 후 그에게서 고백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긴가민가했다.호감이 없는 건 아녔지만 계속 전달되는 메일 속의상대들을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컸다. 삼프터에도애매하면 인연이아닌 거겠지.고민 끝에 전화로 생각을 전하려는데수화기 사이, 다정한 서울말씨가 먼저였다.친구와약속을 마친 나를집까지데려다주고 싶다고.아니, 이러면 곤란해지는데. 괜찮다는데도 상대는 꼭 그러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남자 꽤나집념이강하군.순간 동질감이라도 느낀 건지그러라고 했고 결국그날 그와시작하고 말았다.
이후 우리는 가을의 끝자락까지 연애했다. 한 계절이 조금 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내 밑바닥을 본 유일한 남자가 되었다.이런 류의 결핍은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되니까. 아니, 나만 그런 건 아녔으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에게 덜 미안해도 되니까?
그는 나를 다그쳤고 나는 엉겨 붙은 것을 토해내듯울기 시작했다. 만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사람 앞에서, 모든 사회적 체면을 내려놓은 채 아이처럼. 돈을 갚지 않는 외삼촌을 비난하는 아빠를 따라 외가에 반감을 가지던 유년기를 지나, 사방이 꽉 막힌 어두컴컴한 독서실로 대표되는 학창 시절, 크게 달라진 것 없이 도서관에서 혼자 빵으로 점심을 때우던 본과생 때, 밤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심해로 빨려 들어갈 것 같던 인턴, 이후 투자 실패로 무기력증에 빠졌던 지난 1년까지. 오랜 시간 퀘퀘이 부식되어 문드러진 마음을입 밖으로 꺼내는 건 정말 부끄러웠다.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이해받고 싶었다. 내 고름 같은 결핍까지 수용되길 바랐다. 착잡한 표정으로 얘길 듣던 상대는긴 한숨을 뱉었고 울음으로 들뜬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불신했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우리는 서로에게 있어 지인들이 '걔랑 왜 사귀어'할 때걔의역할이었다.그럼에도 한편으론 믿었다. 나는 그의 눈물을, 그는 나로 인한 아픔보다 나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각각의 이유로 만남을 이어갔지만 관계는 급속도로 너덜너덜해졌다.마치 Ktx의 충전포트처럼.
"이럴 거면차라리 그냥헤어지자고 해."
수화기 너머 상대는 여러 번 같은 말을 뱉었다. 그러나 아무래도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잃는 것을 그리고 후회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상대가 먼저 나를 떠난다면합리화 기제를 발동시켜 어떻게든 잊어내겠지만 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정에 대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책임이 따르는 것을잘알고 있었다. 내가 너무 경솔했던 게 아닐까. 다시 그렇게 날 아껴줄 사람 못만나면 어떡하지. 그리고 그는상실을 병적으로 무서워하는 나를알고 있었다.
"그럼 오빠가 헤어지자고 하면 되잖아.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현 상황이 너무 괴롭다면서도이별을 전가하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유해보이는 생김새와는 달리결단력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확신이 서면 강하게 밀어붙였는데 투자에 있어선 전 재산을 한 종목에 몰빵한 적도 있다고 했다.그러나 3-4배까지 불었던 잔고가 원금까지 모두 날아가고 마이너스로 추락해 버렸지만 그날도 꿋꿋이 야근은 했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멘털 하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심기일전한 코인이 잘 풀린 것도그런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그도 도저히 견디기 힘든 게 있다고 했다.
"... 나는 너랑 헤어지기 싫으니까."
바로 관계랬다. 자신을 해하는 관계를 놓지 못해서 손해를 키우는 우리, 닮아서 좋았는지도 모른다.적어도 나는, 예전의 나와 닮은 면이 있어서 보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견디고 견디고 견디던 어느 날, 마침내내 입에서이별이 나왔다. 우리 정말 그만해. 이제더 이상은 못하겠어. 그는절절하게 붙잡았지만 이미 수십 번 속으로 뱉은 말이었다.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 둘 중 하나만 힘주어 잡아당기면 끝나는 거였는데 너무 오래 끌어버렸다.
이후 열댓 명과 선을 봤다. 그중한 두 명과는 사귀기도 했지만오래가진 못했다. 비록 배우자 찾기엔 실패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우선 헤어지자고 먼저말해도 천지개벽할 일은 생기지 않음을 깨달았다. 만약 후회하더라도 잠시뿐이라는 것도. 당시 그만해야겠다고 판단한 이유가 있고 30년간 쌓인 빅데이터에 의한 결론이니 최선이었다고 믿으면 된다. 그래서 더 이상 손절을 금기시 여기지 않게 되었다. 또 결혼에 대해, 배우자에 대해, 특히 스스로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아무리 돈이 중요하대도 돈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사계절의 시간이흘렀다.다시 돌아온 여름, 가입한 지 1년을 채우기 직전결혼 정보 회사를 탈퇴했다. 모든 게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다만, 그날 아침 끝까지 휴대폰을 엎어두었으면 어땠을까. 보이지 않는 한 가닥이 그와 나 사이에 여전히 이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