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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땡땡 Apr 21. 2024

공부는 일등이었는데 주식엔 멍청이였다.



주식을 시작한 건, 코로나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대략 2020년 초반쯤. 그때 코스피 지수가 2100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니 다소 조정을 겪고 있는 2024년 4월 말 현재보다도 20% 이상 낮은 수치였다. 따져보면 시작한 시점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에는 없는 셈 칠 수 있는 금액만 넣기로 스스로 약속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중에게 주식은 다소 도박의 이미지가 강했고 나 역시 아버지가 테마주로 월급을 통째로 날리는 걸 보면서 절대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다짐했. 처음 계좌에 입고한 건 사회초년생이었던 내 월급의 10% 정도였다.


하지만 그 후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주식시장은 더 무섭게 추락했다. 우량주 대형주 할 것 없이 차트는 내리꽂았고 어디가 바닥인지 누구도 알지 못해서 매체에선 연일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을 내놓기에 바빴다. 이건 대체 뭐 하는 데지? 바닥인가 하면 지하실이 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걸리는 서킷브레이크에 온몸이 얼어붙은 내겐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그러다 만나게 된 곳이 바로,
주린이들의 무덤인 리딩방이었다.

어쩌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초기의 자금은 적었고 지수가 막 떨어져 가던 시기에 물을 부었으니까. 끝을 알 수 없던 추락이 1400에서 멈추고 방향을 돌려세웠을 땐 내 계좌엔 빨간 불이 가득했고 대한민국 역시 주식으로 불타올랐다. 일하는 중에 놓칠까 봐 카톡 알림이 잘 보이는 워치를 구매했고 방장의 수신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매매를 반복했다. 방에서는 연일 그에 대한 찬사와 감사인사가 가득했고 매일 수십만 원의 이득을 실현했다. 운이 좋은 날엔 백단위가 되기도 했다. 금융소득이 달에 월급을 능가하니 정직하게 근로소득만 벌던 지난날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고 일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돈이 생기니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다. 물론 이 시기에 많은 자산을 불린 사람들이 있겠지만, 사회초년생인 내가 당시 실현한 몇 천만 원은 전 재산과 맞먹는 돈이었다. 신이 난 나는 초기의 약속과는 다르게 더 많은 금액을 붓기 시작했다.


우리 직종의 장점이자 단점이 있다. 바로 대출이 잘 나온다는 것이다. 본과 3학년 때부터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할 수 있도록 은행직원이 학교로 찾아온다. 그때 가능한 금액이 3천만 원 정도였는데(지금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학생 때부터 소위 '마통'을 뚫어 여행도 가고 남들보다 좀 더 풍족하게 살려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중에 빨리 갚겠지'라는 생각으로. 물론 학생 신분으로 누리기 어려운 경험을 하는 것이 좋긴 하겠지만 대출을 가볍게 여기게 된다.




나는 엄마의 부탁으로 마통을 뚫었으나, 내 필요로 써본 적은 없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검소한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비록 대학생 때는 4년 연속 장학금을 받고 있다는 구실아래 언니보다 용돈을 좀 더 타 썼지만, 명품에는 관심도 없었고 백화점의 물건은 품번을 알아와 인터넷으로 구매할 만큼 알뜰한 축이였다. 또 내가 입은 텍이 나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가치가 있어야 뭘 걸쳐도 좋아 보일 거라는 신념이 있었다. 그러한 철저한 경제관념과 투자수익 덕에 사회생활 2년 차에 1억에 달하는 돈이 모였고, 20대 중후반이었던 내겐 어떠한 명품백보다 든든한 백이었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장독대에 손을 댄 건 순전히 주식 때문이었다. 물건을 살 때는 최저가를 찾아 천원도 아끼려 하면서 매매로 몇 백, 몇 천을 벌게 되니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빌리는 건 점차 별일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이건 내 미래를 위한 투자야. 돈이 돈을 부른다잖아. 지금 같은 시기에 돈을 썩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하지만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활황기도 2021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진짜  하락장을 겪어본 적 없던 나는, 이전처럼 내리면 다시 오를 줄 알았다. 내가 겪은 1년 6개월간의 시장은 그랬으니까. 그러나 내 앞에 놓인 터널이 얼마나 길고 어두운지 그땐 몰랐다. 연일 웃음이 넘치던 리딩방에는 방장의 버텨달라는 메시지만이 겹겹이 쌓였고 참여자수는 눈에 띄게 줄어갔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도 손절을 못하던 나는 첫사랑에 미련을 못 버리듯 그곳을 오랫동안 떠나지 못했다. 바닥이 있어야 찍고 오르는 거잖아. 지금 떠나면 다시 오를 때 너무 아쉬울 거야.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거야. 그러나 투자를 시작한 지 2년이 넘었을 때 손실은 지금까지의 수익을 넘어섰고 그 무렵 나 역시 더 이상 그 방에 존재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어두워졌다가 밝아졌을 뿐인데 몇 백이 줄어 있는 계좌.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잖아.'라는 말로 수 없이 자위한 지 일 년이 좀 안되었을 때, 무력한 표정으로 미수금을 송금하려던 나는 더 이상 퍼낼 물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당시 마이너스 통장의 한도가 2억 정도였는데, 나는 그 돈을 다 쓰고 만 것이었다. 실체도 없는 것들을 사느라.


다만 주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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