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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땡땡 May 08. 2020

내 첫 타자는 미니홈피였어요.

지금은 브런치를 먹으며 글을 쓰고요.


미니홈피에 접속하려는데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열어본 다이어리 최상단에는 작년 이맘때 흔적이 있었다. 보지 않아도 내용은 뻔할 터. 당시 헤어짐이 임박한 남자 친구에 관해 설움을 토해놓았으리라. 쭉쭉 스크롤을 내리는데 연단 위로 비슷한 내용들이 이어졌고, 기억이 어렴풋나는건 굳이 클릭해보았다. 나란 인간도 참 한결같네...



브런치를 시작한 건 작년 12월, 블로그에 혼자 끄적거린지는 반년쯤, 싸이월드 유행이 지나고도 매해 빠지지 않고 비밀 일기장에 푸념을 털어놓은 건 대학교 입학 후, 좋아하는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건 10년도 더 된 중학교 시절.


방학 숙제가 아닌 자의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교복을 입을 무렵이었다. 또래들처럼 나 역시 격변기를 겪었고 하루하루 감정이 널뛰기하듯 소용돌이쳤다. 이유 없이 우울했던 거 같은데, 떠올려보면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교우 관계, 외모 고민, 다이어트, 성적 압박감, 존재 이유 등.


어떤 계단에 앉아 수화기 너머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던 장면이 기억난다. 서로 바쁜 학생이었기에 여의치 않을 땐, 모니터 앞에 앉았다. 학교에서 일찍 마치는 주말이면 종종 타이핑을 했는데, 대부분 일상적인 감상에 관해서였다. 그마저 어려울 땐, 내 공간은 채 한 평이 안 되는, 커튼 너머 어둠이 득실한 독서실에서 나의 우상(idol)을 통해 이상(fiction)을 꿈꿨다.


팬픽션(fanfiction).

[스타나 TV 프로그램, 영화, 소설, 만화, 음악 따위의 대중문화 작품들의 팬들이 창작한 픽션을 일컫는다.]


작은 방에 모인 학생들을 딱딱한 나무합판으로 분리한 까닭은 그를 위함이 아니었지만, 커튼을 치고 전자사전을 열면 작지만 넓은 세상이 펼쳐졌다. 메모리를 가득 채운 소설을 읽으며 나도 몰래 킥킥 대다 곧 숨죽이는 때가 훨씬 많았지만, 학창 시절의 무료함과 갑갑함을 스스로 만든 세상에서 달래기도 했다. 굳이 아이돌이 아니어도 되는 소년 소녀의 이야기였음에도 실제 주인공을 떠올리면 진행이 좀 더 수월했고, 그곳에서 나는 전지전능했다. 없는 능력이 하나 있었는데, 사랑해 본 적도 없으면서 사랑 얘길 썼다.


그중에서도, 스스로 바라는 열여덟 살의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투영한 단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치하고 오글거릴 수 있지만 때 묻지 않은 감성이 있기에, 계절이 돌아오는 요즘 꺼내읽고 싶다. 분명 그때, 어른이 되면 지금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하는 궁금증이 었었는데, 스물여덟이 된 나는 본가 짐꾸러미 속 어딘가, 먼지 묻은 전자사전에서 그들을 만난다면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을 마주친 기분이 들 것 같다.



간절하고 절실했던 수험시절에도 아주 종종 타자를 두드리곤 했지만, 막상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읽지도 않았다.




첫 직장을 퇴사한 뒤 빈 화면으로 돌아왔다. 돌파구를 찾아왔다. 어른이 됐어도 응어리진 감정을 풀어내는 법은 어릴 때보다 미숙했고, 토할 만큼 마시는 술, 토로, 의존 외에는 몰랐다. 술은 줄였고, 대신 써 내려가야 하는 막막함을 선택했다. 십 년 만이다.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모두 잠금장치를 걸어뒀던 비밀 일기장이 아닌, 모두에게 오픈된 공간이라는 것. 너무 슬픈 날, 기쁜 날, 그저 그런 날. 툭 내뱉은 얘기에 한 줄 답장이 온다. 그 점이 좋다.



내게 타이핑을 하는 건 설렘이자, 막상 몇 문단이 써지기 전까지 주저함과 마주하는 일이다.


글을 쓰겠다는 마음은 설렘을 몰고온다. 괜스레 머리가 묵직해지는 느낌도 든다. 요일은 휴무날, 시간은 모두가 잠든 새벽, 장소는 몇 군데 빈자리가 있는, 너무 시끄럽지 않은 개인 카페가 적당하다. 휴대폰과 블루투스 키보드 그리고 아메리카노 한잔과 스콘이면 행복이 멀리 있지 않음을 느낀다. 이 중 하나라도 성립되면 나쁘지 않다.


요 근래 머리가 묵직한 느낌에 두 눈을 감았다 뜨는 일이 잦아졌다. 빈 페이지를 글자로 채워가는 일 역시 무게를 차지한다. 나는 전개 너머 어디에 와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로 앞에, 전보다 더 클지 모를 위기와 절정이 기다리는지 모르지만, 그 막막함과 마주하고자 한다. 타자를 입력하기 전 손가락의 머뭇거림처럼. 첫 타자가 어렵지, 다음은 처음만큼은 아닐 테니. 피아노 건반처럼 아름다운 소리 대신, 내 속에 공명을 울리는 타닥하는 움직임 또한 멈추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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