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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땡땡 Apr 19. 2020

수고로운 선물

누군가 나를 떠올리며 고르고 고른다는 것.


"최근에 선물을 받고 이렇게 감동해 본 적이 없는  같아요."


진료시간이 끝날 무렵, 평소보다 많은 환수에 스스로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환자를 보내고 진료실의 문고리를 돌리는데, 타인의 출입이 드문  방 앞에 같이 일하는 선생님이  계셨다. 하실 말씀이 있는 걸까. 퇴근을 향한 욕구를  누르고 그녀의 옆에 서자 책상 위에 놓인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종일 변화가 없던 얼굴에 다소 놀란 감정이 드리워져선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주저하듯 내뱉은 말은 뜻밖이었다.


"선생님 생각하면서 샀는데 드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드려요, 재미없으면 버리셔도 돼요."


얼핏 들여다본 쇼핑백 안에는 책 3권이 가지런히 담겨있었다.




선물은 3가지 의미를 지닌다.


1. 화폐에 상응하는 가치를 포기하고 나에게 준다는 것 (돈을 쓴다.)

2. 나를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생각해 주는 마음

3. 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고르고 고르는 수고로움


선물은 어렵다. 돈도 돈이지만 궁극적으로 받는 이를 즐겁게 해 줄 무언가를 찾아야 하기에 고민스럽고 시간도 많이 든다. 잘 아는 사이거나 평소 함께 보낸 시간이 길다면 낫지만 역시 수고가 따른다. 이를 알기에 요즘은 생일이나 기념일에 갖고 싶은 걸 묻는 물음에 돌려 말하기보다 정해주는 편이고, 심지어 좌표를 찍어주기도 한다. 기억해 주는 게 어디고 물어봐주는 게 어디야.


반대의 입장일 때도 직접 말해주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번거로움이 줄어들고 돈만 쓰면 되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갖는 위치를 생각할  자체로도 충분한 선물임은 틀림없다. 받는 사람은  갖고 싶은 걸 갖게 되고, 주는 사람은  고민  해도 되니 윈윈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이토록 뜻밖이고, 이토록 가슴을 데우는 선물을 받은 적이 있을까.


오늘은 내 생일도 아니고, 그녀와는 일주일에 한 번 보는 사이며 대화의 대부분은 사무에 관한 것이다. 늘 잘 웃어주시는 분이지만, 주말에는 더 많은 환자를 웃으며 대해야 한다는 이유로 직원들을 대하는 내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대표원장이 아닌 부원장이고 월급을 주는 사람은 내가 아니니 그녀가 나를 신경 써줄 이유는 없다. 흔한 직장 동료사이일 뿐.



그런데 우리 사이에 거창하지 않은 비밀이 하나 있긴 했다.


브런치에 쓴 글을 실수로 카카오톡 프로필에 공유한 적 있었다. 절친한 친구가 알려줘서 며칠 뒤에 지웠고, 프로필을 누른 다음 몇 번을 더 눌러야 나오는 글을 아무도 보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내 남자 친구도 그만큼의 열정이 없는걸. 그런데 얼마가 지난 일요일 오후, 뜬금없이 그녀가 그걸 봤다고 했다. 잘 읽었다고.


누구든 알아주기를 바랐지만, 한편으론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마음.


들키고 나서 내 민낯을 보인 듯 부끄러웠다. 선생님 그거 잘못 공유한 거예요. 둘만 있는 자리였지만 민망함에 빠르게 지나쳤고 그녀는 몰랐다며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후 타이핑을 하다 멈칫한 적도 있지만 이야기를 멈추진 않았다. 이 세상의 누군가는 내가 어떤지, 어떤 생각하는지 알아주길 바랐으니까. 그런데 요새 이야기가 너무 우울했나 보다. 생각지 못한 응원 꾸러미를 받은걸 보니.


아니, 그보다 그녀가 정말 따뜻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다. 나 좀 알아달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고 사려 깊은 방식으로 위로를 전하는. 고민의 흔적이 너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오늘은 비가 많이 내렸다.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쪽에는 묵직함을 느끼며 카페로 향했다. 한 권은 동화 같고, 하나는 사진이 많고, 나머지는 감정 사전 같았다.    권을 고르신 건지 무슨 얘기를 전하려 한 건지 궁금했다.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 하지만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감정 때문에 집중이 되진 않았.


 또한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을   있었고, 그를 떠올리며 얼마나 고르고 골랐는지 생각났으니까.


통유리창 너머 빗방울이 하염없이 쏟아. 나는 빗소리와 빗방울을 좋아하고, 카페에 앉아  쓰는  즐겁다.  순간이 선물 같이 느껴진다. 마음이 희미해지기 전에 타이핑을 한다.  글이 그녀에 대한 답장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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